이웃 아낙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보여 쫓아왔다며 농막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에게 나는 보리차를 끓여주었다. 나도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보리차를 같이 마셨다.
그녀의 남편이 같이 오지 않아 안부를 물으니 남편은 감기로 고생 중인데 병원 가라고 해도 안 가고 집에 있단다. 말을 안 들어 죽겠단다. 습관처럼 그녀에게서 남자의 흉이 또 나왔다.
지난봄에 남자가 기관지에 좋은 꽈리를 심으면 수익을 오륙백만 원은 올릴 거라며 밭에 꽈리를 심었단다. 심어만 놓고 분명 돌볼 것 같지 않아 꽈리 심는 걸 그녀가 처음부터 반대했으나 그는 여러 고랑 심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살피지 않았다.
수확하는 가을철이 되니 쓸만한 꽈리가 없었다. 건진 게 작은 봉지로 한 주먹씩 두 봉지 나오더란다. 그걸 남자가 매장에 내달라고 졸라 그녀가 그 두 봉지를 매장에 냈다.
남자는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꽈리가 나갔나 궁금해하며 가서 매장을 둘러보더란다.
매장을 둘러보더라는 말에 덩치 큰 그가 꽈리 봉지 두 개가 올라있는 매대를 들여다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크게 웃었다. 남편도 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그래서 두 봉지 다 나갔느냐고 물었다. 한 봉지도 안 나갔단다. 나는 또 크게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오륙백 바라보고 지은 꽈리농사가 수입이 빵원이라고. 나는 너무 웃어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참깨도 심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어도 여러 고랑 심더니 그예 다 망쳤다고, 다 익은 참깨를 베어 밭에다 그냥 뉘어놓고 비닐로 숨도 못 쉬게 씌워놔서 비가 오니 곰팡이 나고 썩었다고. 쭉정이 빼고 고르니 쓸만한 양이 딱 닭 눈깔만큼 되더란다. '닭 눈깔만큼' 표현에 내가 또 손뼉을 치며 웃었고 난로 안에서 활활 불이 붙은 장작을 금속 부주깽이로 뒤적이던 남편이 웃음을 못 참겠던지 부주깽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남자에게 좋게 말했단다. 내가 호박잎등 매장에 내는 게 우스워 보여도 살펴주고 거름 주고 온 정성을
다해 돌본 뒤에 상품가치가 되도록 해서 내니까 팔리는 거라고, 뭐 거저 되는 게 있는 줄 아느냐고.
그녀가 계속 남자의 흉을 보았고 나는 계속 웃었다.
그녀가 몸도 따뜻해졌으니 이제 가서 밭에 묻어놓은 동치미를 개봉해야겠단다. 그녀의 남자가 겨울이면 동치미만 먹어서 실컷 먹으라고 많이 담가 묻었단다.
세상 모든 일에 궁금한 게 많은 나는 그녀와 함께 일어서서 쭐레쭐레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밭고랑 입구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펼쳐놓은 비닐을 벗겼다. 다음에 그 아래에 겹쳐 납작하게 덮어놓은 종이 상자를 벗겼다. 다음에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몸을 더 구부려 두 개 겹친 봉지의 끈을 풀으니 옛날 우리 어머니, 그 윗세대들이 담근 재래식 동치미가 있었다.
나는 어머나 어머나...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의 동치미네요 하며 놀랐다. 순간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걸 생각해 내고 돌아 우리 밭으로 뛰었다.
농막 탁자에 있는 휴대폰을 들고 그리로 다시 뛰었다. 그녀가 기다려주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녀가 나를 배려해 동치미 봉지를 바깥쪽으로 더 넓게 펴주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동치미에 들어간 재료가 무엇 무엇이냐고 물었다. 쌀가루로 쑨 풀, 청갓은 국물 시원하라고, 고추씨는 망에 담아, 사과, 배, 파,청양고추, 생강, 쪽파를 넣었다고 했다. 간은 아주 짭짤하게 해야 무르지 않게 두고 먹을 수 있단다.
그녀가 상체를 깊숙이 구부렸다 올렸다를 반복해 동치미를 통에 퍼담으며 말했다.
"이렇게 세 번 퍼 나르면 봄이 와요."
'세 번 퍼 나르면 봄이 와요.'
표현이 문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이는 작가가 아닐까. 나는 그동안 만나온 많은 이들에게서 문학적 표현을 발견했었다.
나는 선 채로 세상에나 세상에나...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동치미를 통에 다 담고 나서 비닐 입구를 묶으면서도 남자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이걸 이렇게 비닐을 두 개 포개서 담았는데도 남자는 국물이 샐지 모르니 하나 더 포개라 하고 주둥이도 이렇게 짱짱히 묶었는데도 한 번 더 묶으라고 잔소리한다고. 지 농사나 좀 그렇게 짱짱하게 짓지.
농사 수입이 빵원이어도, 동치미 담긴 비닐 주둥이 짱짱하게 한 번 더 묶으라 잔소리 한대도 그 나이에 철물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어 짱짱한 그들의 경제사정을 잘 알기에, 오직 그녀의 남자만을 위해 동치미 담가 묻은 걸 알기에 나는 편하게 웃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깔깔 또 웃었으니까.
일을 마친 그녀가 플라스틱 뚜껑을 덮고 납작한 종이 상자를 덮고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돌 화분, 쇠 파이프, 나무둥치 돌 등 무거운 기구로 눌러놓았다.
그녀가 동치미 한 통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었다.
선조 때부터 담가온, 선조들처럼 땅에 묻어 보관해 깊은 그곳에서 퍼낸 이 귀한 동치미를!
그녀는 내가 들고 가기 무거울 테니 자기가 우리 농막으로 들어다 주겠단다. 나는 또 깜짝 놀라 우리 농막이 여기와 붙어있듯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내가 왜 못 들고 가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더구나 그녀는 나보다 육 년이나 인생 선배가 아닌가.
돌아보면 나의 삶은 지금껏 이렇게 흘러왔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며 쳐다보다가 순간 내가 이미 쥐고 있는 게 많음을 발견했고, 내가 필요한 줄도 미처 모를 때 누군가는 앞으로 꼭 필요할 무언가를 주었다. 누군가는 내 심신의 짐을 몽땅 들어주기도 했다.
그저 호기심 하나로 누군가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간 곳에서 선 채로 입맛만 다셨어도 누군가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지 않은 곳에서 받은 것이 많은 나의 삶이었다.
깊은 곳에서 퍼낸 깊은 맛의 동치미가 나에게 들어온 건 분명 길조다.
지난해에도 지지난 해에도 그랬듯 올해도 분명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다.
나는 동치미통을 두 손으로 안고 우리 밭으로 걸었다.
아까 슬며시 밖으로 나갔던 남편은 사다리에 올라 꾸지뽕나무를 전지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