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by 개울건너

TV 시청료 영수증이 책장 아래 바닥에서 보였다.

신혼시절 시청료 거부운동에 동참했다가 몇 년 후 확인 조사하러 나온 동사무소 직원에게 집에 TV 있는 걸 들켜 다시 내기 시작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가계부 안에서 스카치테이프의 힘으로 오랜 세월 버티다가 기운이 다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결혼하고 한 달 후 새해부터 쓰기 시작해 98년도 초에 멈춘 가계부는 생존을 위한 기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영수증을 다시 갈피에 끼워 넣기 위해 책장에서 여러 권의 가계부 중 한 권을 빼서 열었다.


'언제까지나 가슴의 불은 불인채로만 존재하려나.

재조차도 남기지 않게 타버릴 날은 언제인지.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불씨라도 묻고 키우며 키우며 버텨야지.

살 맛 나는 계절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높다.

나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두부 한 모 200원, 생강 50원, 번개탄 300원, 무 한 개 300원이라 쓴 아래칸에 해둔 기록이다.

그날의 지출 품목과 함께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보인다.

예쁜 휴식도 함께 있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새 없이 바삐만 살아온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다고, 신혼 단칸방의 꽤 큰 창문 너머로 자주 바라본 하늘이 푸르렀다고 가계부의 기록이 일러주고 있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안 되면 되게 하라’- 비장함이 느껴진다. 무슨 군대 구호도 아니고..

콩나물 100원, 돼지고기 3000원, 상추 한 근 400원..이라 쓴 위 칸에 해놓은 기록이다.

영육이 다 건조했던 내가 보여 건조한 웃음을 짓는다.


'29세,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전문직 하나 없음에 대한 후회, 앞으로의 나의 개인적인 설계와 내일, 모레, 당장의 계획. 복잡하다.'

껌 100원, 연탄 백장 16600원, 커피 믹스 280원...이라 쓴 아래 빈칸에 돼있는 기록이다.


'어떤 형태로든 내부로 내부로 깊은 곳에 뭉쳐진 나의 굳건한 힘이 구체화되어 터질 날이 있음을 믿는다.'

가지 200원 고추 100원 복숭아 300원이라 쓴 아래 칸에 해둔 기록이다.




'키우며 키우며'

'내부로 내부로'

반복어에선 비장함이, 반복어 사이의 공간에선 더 단단한 비장함으로 돋기 위해 고르는 숨소리가 들린다.


'수입란’엔 <체르니 40번 시작>이라 적혀 있다.

결혼 전 직장 생활할 때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를 신혼 때도 계속 배우고 있었다. 소질도 없으면서 나 체르니, 그것도 40번 친다고 누구한테든 자랑하고 싶어 진도만 나갔던 같잖은 허세가 보여 피식 웃는다.



94, 5, 21

'그는 오늘도 야근.

엄마랑 자고 싶다는 두 아이 사이에 누워 팔베개를 한다.

"엄마, 사람은 모두 죽는 거야?"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끝없는 질문과 대답 끝에 꿈나라로 가는 녀석들 뒤로 시계를 본다


까만 미래를 생각하며 깜깜해진다.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밝아진다.'

그날의 지출은 아이스크림 1000원, 카드 1000원이다.


그때 네가 했던 그 선택은 부모 쪽만 배려한 것이었지. 아니라고 엄마 아빠는 괜찮다고, 네 생각대로 선택하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그때 내가 너에게 말을 그렇게 해선 안됐는데.. 미안해.

얘들아 미안해.

아이들에겐 미안한 기억들 뿐인데 그날의 기록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이들과 나눴던 따뜻한 시간도 이렇게 있었노라고.




남편이 한 달도 거른 적 없이 받아오던 월급봉투는 가계부 안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있다.

월급을 다 저금하고 격일제 근무인 그가 쉬는 날마다 벌어오는 부수입으로 생활했다. 한 땐 부수입도 여유가 있어 거기에서도 저금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땐 중고등학교가 의무 교육이 아니었다. 등록금 외에 다른 아이들처럼 교육비 지출이 많진 않았는데 빚을 지게 될까 두려워 그땐 사는 게 시퍼런 바다 위에서 외줄 타는 심경이었다.


무엇을 향한 갈망이었는지,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무엇이 되게 하라고 나를 채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로로 몇 차례 겪은 남편의 혼절은 이곳에 기록되지 못했다. 신발 끈을 급히 조이던 나의 절박감도.


건조한 열망, 불안, 파란 꿈, 후회, 남편이 1년 730일 일해서 가져다 준 돈을 들고 은행으로 향하던 발걸음, 각오와 다짐, 사랑, 허세, 위안, 외줄 타기의 식은땀 나도록 아슬아슬했던 시간들의 기록들과 기록되지 못한 채 함께 해온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어있다.

이제 또 앞으로 기록될 시간들과 기록되지 못할 시간들이 녹아들어 더해지며 내가 되어가리라.

바깥에서 부는 겨울바람 소리가 세차다.

이번 주는 내내 강추위가 계속되리라는 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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