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과 마지막 봄

by 개울건너


택배가 왔다. 설 선물로 올케 언니가 보내주신 곶감이다. 예쁘게 담아 포장된 곶감은 색깔도 곱고 달았다.




결혼한 84년도 그 해 겨울, 시아버지 제사에 갔다.

나에게는 결혼 후 첫제사였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때이다.

방에서 툇마루로 나와 걸터앉아 신발을 신고 돌아 부엌으로 들어가면 앞 뒤 나무문을 닫아걸었어도 부엌은 뒷산과 앞 벌판에서 닫은 문 새로 들어오고 나가는 황소바람으로 몹시 추웠다.

시집에 아직은 낯선 새 며느리의 입장을 배려해 주시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모든 일을 다 하셨지만, 그분들 곁에서 털조끼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도 휘감고 나가는 찬바람은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더욱 한기로 떨게 했다.


무심코 올려다본 시렁 위에 곶감이 보였다.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고 여기저기 던져져 있는 느낌이었다.

짙은 갈색으로 동그랗고 납작하게 말라있으면서 하얀 분을 뒤집어쓴 저 곶감, 어릴 적 옆집 정순이가 제사 지냈다며 한 개 줘서 그때 딱 한 번밖에 먹어본 기억이 없는 그 곶감, 임금님 수라상에나 올랐을 그 귀한 곶감이 저기에 있는 것이다.

잠시 부엌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나는 곶감 하나를 냉큼 집어 입에 넣었다.

기대만큼 환상의 맛이었다.

모든 식구들이 제사준비로 들락날락 바쁜데 나는 곶감 맛의 여운과 아쉬움으로 부엌에 나 혼자만 있게 될 순간을 또 기다리며 침을 삼켰다. 그러다 부엌이 잠시라도 비어있게 되는 때가 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하나씩 집어 먹었다.



깊은 밤 제사가 시작되었다. 제사상에 시렁 위에 있던 그 곶감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몰래 먹은 그 곶감은 이 제사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친정에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제사에 대한 상식이 없었으니 상에 오르는 음식 종류도 당연히 몰랐다. 곶감을 다 먹지 않고 그나마 남겨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해 여름 어머니 생신에 시댁을 갔다. 송편을 만들면서 어머니께 지난 아버님 제사 때 시렁 위에 있던 곶감을 내가 여러 개 먹었다고 자백했다. 어머님은 제사상에 놓으려고 보니 어쩐지 숫자가 너무 줄어있더라고 말씀하셨다.

추석에 또 내려가니 툇마루에서 감이 쪼르르 길게 여러 줄로 앉아 가을햇빛과 바람에 습기를 날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동네에 감나무가 있는 집에는 다 부탁해 감을 얻어다 이렇게 곶감으로 말린다고 시누이가 얘기했다. 그렇게 말린 곶감을 일 년에 한 번씩 봄에 장 담가 주시러 우리 집에 올라오실 때 가지고 오셨다.




그 해 삼월에도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오자마자 체기가 있는 것 같다며 힘들어하셨다.

남편과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

남편은 어머님과 함께 병원에 있고, 나는 아직은 어린아이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어머니가 가져오신 거실 한쪽에 놓여있는 보따리부터 풀었다. 그 속엔 장 담글 재료와 함께 역시 곶감이 있었다. 나는 그 곶감부터 꺼내 먹었다. 계속 먹었다.

이 주일 후 어머니는 예상치 못했던 먼 길을 떠나셨다.

병명은 심근경색. 그러나 어머님은 떠나셨을 뿐, 나는 남편과는 달리 떠나신 어머님에 대한 애도의 겨를도 없이 아이들에게 부질없는 집착만을 떠느라 오래도록 바빴다.



요즘에서야 드는 생각이다.

그때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많았던 양의 곶감은 어머님이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이제 더는 못 가지고 온다는 신호였을까.

어머님께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리지도 못했고, 어머님께서 주신 사랑이 그때엔 사랑인 줄도 몰랐다.


제 입만 생각했던 며느리의 늦은 후회.



쫀득쫀득 점도가 높았던 어머님의 곶감, 특히 먼 길 떠나시기 전에 가지고 올라오신 그 많던 양의 곶감은, 이제 내 가슴에서 그 양만큼이나 아픈 진기로 끈적이며 떨어지길 거부하고 있다.


앨범을 열고 흑백의 어머님 사진을 꺼내 사진관으로 갔다.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늦겨울 풍광 속 칡골 외딴집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시고, 흰 고무신을 신고, 작두펌프대를 잡고 물을 올리고 있는 가녀린 어머니의 모습을 회한의 맘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이 철없는 며느리는 어머님께 한마디 더 한다.

‘어머님이 8년 동안 만들어주신 짙은 갈색의 동글납작한 그 곶감, 저 또 먹고 싶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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