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제사가 다가온다.
그동안 맏동서네서 지내오던 제사를, 그녀도 나이가 들어 힘들어하기에 올해부터는 선산에서 간단히 지내기로 했다.
"이젠 형님네서 제사 안 지내니까 형님네 안 들러도 되잖어? 내일 어차피 산소에서 만날 텐데." 남편의 말에 나는 설이 지난 지도 한참 됐으니 형님네 먼저 들러 식사 한 끼 같이 하고 가자고 했다.
'스프링 버드' 작가님이 브런치에 소개한 책도 몇 권을 골라서 구매해 조카 손주에게 주려고 차에 같이 실었다.
도로가에 물이 오른 연둣빛 버들가지가 늘어져 살랑이고 있다.
우리 애들이 어릴 때였다. 곶감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 가으내 말린 곶감을 장 담글 재료와 함께 가지고 올라오신 어머니는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가서 보름 만에 돌아가셨다. 준비 없는 이별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달리며 남편이 말했다. “그때 어머니 상을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두 안 나네.”
어머니는 그때 예정에 없이 돌아가셨고, 나는 지금 예정에 없던 얘기를 그에게 내놓고 있다.
“당신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생각이 안 나겠지만 나는 또렷해. 어머니 상을 치를 때 당신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더 좋아졌거든.”
삼십삼 년 전, 어머니의 퇴원 준비를 위해 병원에 갔다. 퇴원 전 마지막 병원식사를 하시려는 어머니 곁에서 나와 교대할 시동생이 함께 있었다. 어머니는 먼저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드시곤 목에서 물이 걸리는 컬커덕 소리가 나더니 휭, 휘파람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어머니의 한 생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병원 복도 끝에 있는 공중전화로 며칠을 어머니와 함께 하다가 막 출근한 남편에게 알렸다.
달려온 남편이 오열했다.
그가 돌아서 벽에 이마를 대고 혼잣말을 했다. “차암.. 허망하네.”
문상 온 직장 상사의 위로에 한쪽 무릎을 엉거주춤 구부린 채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눈물을 쏟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어머니의 동생인 시외삼촌이 생각에 잠겨 장례식장을 천천히 왔다 갔다 걸으며 애도할 때 “오늘 밤 외삼촌 잠자리를 어디로 모실까..” 남편이 하는 혼잣말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출상 날 장례차가 장례식장에서 선산으로 출발할 때 남편은 미리 돈을 기사에게 넉넉히 주었다. 세 시간을 달려 선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기사가 돈을 또 요구하며 관이 들어있는 차 문을 열지 않았다.
남편이 말리는 집성촌 집안 식구들을 제치고 뚫고 가며 기사와 싸우려 하자 누군가가 기사에게 돈을 주어 차를 얼른 보냈고, 어머니의 관이 대기해 있던 꽃상여로 옮겨졌다. 그때 나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꽃상여 앞에서 제를 지내는 중이었다.
삼 형제가 무릎을 세우고 손을 모으고 있는데 아직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 그는 지쳐 초췌한 얼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큰 시누이가 “언니, 청심환 있으면 오빠 좀 줘요.”
나는 가방을 열어 청심환을 찾으며 그를 안고 싶었다.
“내가 당신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도 ‘이 남자 진짜 사람이다’ 그 생각에서였거든.”
결혼 전 남편과 사귀던 시절, 우리보다 먼저 결혼한 외사촌 시동생 내외를 만났다. 그들이 시골에 계신 그들의 부모님을 뵙고 왔다고 하자 남편이 외삼촌 외숙모님 편안하신지 안부부터 물었다.
“나는 그때 이 남자는 부모님한테 사람 교육 제대로 받고 자란 사람이구나 생각했거든. 나 진짜 놀랬어!”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두 당신이랑 결혼할 건데..”(내가 왜 이러나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나 참.)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면 나랑 결혼할 거여?”
잠깐의 침묵을 길게 견뎌야 했다. 그가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나를 너머 바깥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휴게소가 어디 있나, 다 온 것 같은데..”
휴게소를 찾은 사람이 휴게소는 들르지도 않고 왜 그냥 가는지..
친구들 모임에 온 막내 시누이를 중간에서 먼저 만나 차에 태웠다.
나의 결혼생활 이야기는 이 시누이를 빼고 풀어갈 수가 없다. 결혼이 개인 간의 약속만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서약임을 나에게 몸소 일러준 사람이 작은 시누이다.
내가 어려울 때마다 천사처럼 나타나 도와준 은인.
내가 큰 아이 낳았을 때 시골집에서 올라와 몸조리를 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눈이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 아기와 나는 따끈한 단칸방에 누워 그녀가 빨래를 널고 걷으러 주인집 옥상으로 올라가 눈 밟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아이의 배꼽이 마를 때쯤 그녀는 사알 살 배꼽을 떼 주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차분하고 성숙했다.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해주고 시골집으로 그녀가 떠났다. 나는 새 생명이 옆에 있다는 기쁨보다는 어떡해야 하나 두려움으로 훌쩍이며 몸살을 앓았다.
삼 년 후 작은 아이가 태어났고 그녀는 또 올라와 한 달 동안 돌봐주고 내려갔다.
봄철이어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일이 바쁜 때였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두 아이는 번갈아 아팠고 급기야 작은 애가 폐렴을 앓게 돼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나는 산후풍으로 바깥바람을 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가 우리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던 그녀의 낯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 가족 아파서 어쩌나 어둡고 다급해 보였던 표정을.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누워서 그 순간에 다 보았다.
이후로도 아이들이 아파 편할 날이 없던 우리 집을 그녀는 수시로 오르내렸다.
농협 다니던 옆집 총각과 연애 결혼한 그녀는 지금, 고향에서 부농의 안주인이 되어있고 그녀의 시어머니와는 국이 식지 않는 거리에 살며 남편은 이장, 그녀는 동네 부녀회장을 맡아 재미있는 삶을 엮어가고 있다.
나는 뒷좌석에 앉은 시누이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고모랑 먼저 만나 이렇게 같이 가니까 좋다!"
그녀가 웃었다.
맏동서네 집에 도착했다.
나는 책 선물 상자를 문갑 위에 놓으며 맏동서한테 조카 손주에게 전해주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 같이 식당으로 갔다. 시숙이 계산서를 아예 당신 옆에 놓고 식사를 했다. 남편이 빠르게 계산할까 봐서.
이 고장의 음식은 어딜 가나 맛이 좋다. 시숙과 맏동서가 안내해서 먹은 아귀찜도 맛이 좋았다. 이 여러 반찬들을 어쩜 다 이리도 정성스럽게 만들었을까 내가 말했다.
시누이가 화장실도 가지 않고 나와 함께 계속 있게 돼서 시숙과 동서에게 봉투 줄 기회를 못 잡고 있었다.
식당에서 집에 도착해 시누이가 맏동서와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주차하느라 나중에 들어가는 시숙에게 대문 앞에서 봉투를 살짝 드렸다. 제사를 없애 빈손으로 왔을지도 모를 시누이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어 그리 한 것이다. “아주버님, 친구 분들이랑 맛있는 거 사 드세요.” 그의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시숙이 올해 여든다섯이다.
그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맏동서가 무릎 수술 후 아직 회복이 안 돼 서있는 걸 힘들어했다. “언니들 앉아있어 커피 내가 탈게.” 시누이가 주방에 서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그녀 뒤 식탁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맏동서에게 봉투를 살짝 건네주었다.
동서가 아후 어떡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세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주머니에 넣으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내 옆에 앉은 남편과 맞은편 동서 옆에 앉은 시숙도 조용히 있었다.
아메리카노 믹스커피 등 취향별로 탄 커피를 시누이가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았다. 나는 아이구 시누이님 감사합니다 하며 받았고 모두 웃었다.
우리가 더 머물면 몸이 안 좋은 맏동서가 힘들 수 있겠어서 일어섰다.
맏동서네와는 내일 선산이 있는 막내시누이네 집에서 먼저 모여 산소에 가기로 하고 나왔다.
우리는 큰 시누이가 일하고 있는 일터로 향했다.
결혼하고 처음 큰시누이의 집에 갔을 때 그녀는 밭이 딸린 허름한 주택에서 근처에 있는 학교의 한 교사를 하숙생으로 두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 밭에서 농사를 기름지게 지어가며 근처 학교에서 기술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 방문한 처남댁(나)의 흰 커버양말 몇 켤레와 첫 아이를 가진 나의 임부복을 사서 시누이에게 주라고 전달했었다.
이후에 시누이는 우리 아이들의 성장 시기에 맞춰 옷을 사뒀다가 우리가 방문하면 입혔다.
몇 년 후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큰 주택을 마련하고 그곳에 딸린 너른 밭에 채소를 가꾸며 살았다.
어느 날은 그녀의 남편이 철도청에서 임대해 준 저 뒤 베란다 너머로 끝이 안 보이도록 긴 논의 문서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집에 딸린 밭농사만도 힘들 텐데 어떻게 논농사까지 가능한지 우린 놀랐다.
이후 가을마다 이 집에서 보낸 쌀가마가 우리 집에 배달됐었다.
가끔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고 춤도 추었다. 음치에 박치이기도 한 그는 우리가 자기 집 찾은 것에 신이 나 몸을 꼬며 박자에 못 맞추는 춤을 추어 우리를 많이 웃게 했다.
가을마다 뒤 베란다 너머에서 황금물결은 여전히 출렁이지만 그 논의 임대문서는 지금 다른 이에게 넘어가있다. 그는 퇴직 후 들이닥친 무기력증으로 인한 두문불출로 모든 농사일까지도 손에서 놓은 상태다. 지금이 그들 부부에겐 가장 좋은 시절인데 안타깝다.
큰 시누이네 직장 앞 주차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와 종일 같이 집에 있는 게 힘들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녀는 이렇게 밖에 나오니 살 것 같단다.
그녀는 주문해서 받았다는 조화를 우리에게 주었다.
“저는 내일도 일을 해서 못 가니까 산소에 가거든 엄마 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어버이날에 가겠다고요.”
돌아서는 그녀의 주머니에 나는 봉투를 넣어주었다. 그녀가 깜짝 놀랐고 나는 그녀의 등을 밀어 직장으로 들여보냈다.
꽃을 차에 조심히 싣고 막내시누이네로 향했다.
밤이다.
방이 두 개 있는 막내시누이 집에서 시누이 내외는 작은 방에서, 큰 방에선 언제나 그리 했듯 밤늦게 도착한 시동생이 저쪽 벽 쪽에서 나는 이쪽 벽 쪽에서, 나와 가까운 쪽으로 가운데서 남편이 잠을 청했다. 티브이는 혼자 떠들어대고 있다. 시동생이 티브이 시끄러워서 잠 못 자면 끌까? 물었고 남편은 티브이 소리가 자장가니까 안 꺼도 된단다. 티브이 시사 방송을 자면서 깨면서 듣던 남편은 여당 욕을 졸린 소리로 했고 시동생은 야당 욕을 졸린 소리로 했다. 나는 “여당 이겨라!” 속으로 외치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몇 시나 됐을까 나는 잠결에 남편의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거리며 그의 손을 찾았다. 그가 그의 손을 내어 내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힘을 주었다. 나도 힘을 주었다.
이른 시간인데 주방에서 뚝딱뚝딱 지글지글 아침식사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김치랑 간단히 먹지 막내는 뭘 저렇게 하냐고 잠이 있는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일어나서 이불을 접어 한 옆으로 놓고 주방으로 나갔다. 뭘 그렇게 하냐고 간단히 먹자고 하니 그녀가 아무것도 안 하니 들어가서 더 자라고 말했다.
"고모, 이거 나 주지. 밑에 고무줄이 있어 바닥에 닿질 않아 좋네."
입고 잔 그녀의 수면 바지가 편하고 따뜻했다.
"그려 가져가 언니."
북엇국이 냄비에서 끓고 있고 옆 화구에 팬을 올린 그녀는 식용유를 두르고 박대를 올렸다. 나는 박대라는 생선을 결혼해서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시누이가 그러냐고 말하며 팬 위에 접은 종이 달력을 올려 덮고 뒷마루로 내려갔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팬을 덮어놓은 종이 달력에 불이 붙을까 염려하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덮으면 기름이 주방 벽으로 유리창으로 튀지 않아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우리 집 주방 벽과 창문으로 튄 기름을 생각하며 집에 가면 생선 튀길 땐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간 2월 달력 뜯어 접어 덮으면 되겠다고. 종이에 불이 붙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가 북엇국에 넣을 파를 가지고 주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식탁 뒤쪽에 플라스틱 페트병에 가득 담긴 쥐눈이 콩 두 병이 있었다. 나는 쥐눈이콩을 저렇게 담아두니 더 귀엽다고 했다. 그녀가 그건 나에게 배운 거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페트병에 쌀, 서리태 등 넣어두고 먹으니 좋아 보여 그녀도 그리 했단다.
맏동서가 오기 전에 그녀에게 줄 것이 있다.
나는 고모와 고모부 둘이 외식이라도 하라며 봉투를 찬장 문을 열고 넣었다. 이 모습을 맏동서가 보게 된다면 맏동서는 불편할 수 있고 시누이는 민망할 수 있기에.
나는 뒤란으로 가서 명자꽃, 천리향, 장독대를 사진 찍었다. 시누이가 쌈채소 가져가 우리 밭에 심으라고 했다. 겨울을 난 거라 뿌리가 깊고 질기단다.
그 말의 끝에서 생각했다. ‘사람도 추운 시절을 견디고 나야 심지가 깊어지고 질겨지리라.’
쌈채소를 우리에게 주려고 그녀가 삽으로 파고 남편이 나와서 흙 채로 용기에 담는 모습을 나는 사진에 담았다.
그녀가 손님 올 때만 내리는 동그란 상을 냉장고 위에서 내렸다.
거기에 반찬을 놓기 시작했다.
역사는 큰일이 만들기도 하지만 사소한 말과 행동이 쌓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특히 가족의 역사는.
아름다운 역사가 될 소중한 시간의 움직임들을 나는 틈틈이 사진 찍고 동영상으로 담는다.
반찬을 다 놓자 나는 고모네 밥상은 늘 정겹다고 말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아유 아무것도 없는 밥상을 또 찍느냐며 웃었다.
반찬을 다 올린 그녀가 꽤 큰 이 밥상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아이구 같이 들어 같이! 하니 그녀는 아니야 괜찮아 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구운 박대에 내가 젓가락을 댔다. 박대 살이 쫀득거려 가시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남편이 박대를 아예 꺾어 반 토막을 가져다 먹으란다. 시동생이 젓가락으로 잡아주고 내가 반으로 꺾으려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시동생이 주방과 우리 밥상 사이를 오가는 시누이에게 니가 이것 좀 손으로 찢어봐라 말했다. 그녀가 손을 씻고 들어와서 방바닥에 앉더니 손으로 살을 발랐다. 다 바른 박대 살을 제일 먼저 내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몇 달 전 구십 세 가까운 그의 어머니가 심장판막 수술을 했는데 수술실을 나오며 옮겨지는 침상에서 누운 채 엄마 엄마 부르더라고. 엄마라는 존재가 이렇구나, 가슴이 뭉클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박대살을 계속 찢으며 시누이가 “그 엄마라는 존재가 차암..” 내가 말을 받았다. “응 자식은 엄마 자궁에서 나왔으니까.” 그녀가 으응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자 그녀의 남편이 찹쌀 한 포대와 멥쌀 한 포대, 감자 한 상자를 현관문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이거 가져가셔유.
시누이가 전기장판, 밀폐용기, 나박김치도 내놓았다.
나는 이따가 맏동서가 와서 보면 서운할 수 있으니 우리 차에 얼른 실으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맏동서와 시숙이 도착했다.
우리는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선산으로 출발했다.
삼십삼 년 전 어머니의 꽃상여가 놓여있던 자리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산소로 올라갔다. 시누이가 맏동서의 손을 잡고 살살 같이 올랐다.
산소 바로 아래 평평한 이 터가 내가 시집오기 수년 전까지 우리 시댁 가족이 살았던 외딴집 터였던 건 알고 있다.
울타리는 탱자나무였고, 집 뒤편으로 단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마당가로는 보리수, 앵두나무, 산딸기나무가 있었단다. 여기가 마당이었고 여기가 아버지가 파서 만든 손잡이로 눌러 올리는 우물샘이 있던 자리라고, 지금 여기 파보면 물이 나올 거라고 했다. 그 시절 시댁 가족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그때의 그들의 일상을 지금으로 가져와 초가지붕의 마당에서 탈곡기를 손질하고 라디오를 만드는 아버님을, 포도나무 넝쿨 아래에서 우물 샘 손잡이를 잡고 물을 올리는 어머니를 보며, 육 남매가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살고 있는 그들 곁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 웃음소리, 숨소리까지 기록하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그때는 땔감이 귀해 생솔가지를 연료로 많이 땠단다.
옆 동네에 살다가 시숙과 결혼한 맏동서가 말했다. 어려서 이 동네를 지날 때 이 집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며 저 외딴집은 생솔가지를 때고 있구나, 생각했다고. 마른나무를 때서 올라오는 연기와 생 솔가지를 때서 올라오는 연기는 다르단다.
산소에서 맏동서가 준비해 온 따끈한 차와 세 개의 과일을 놓고 절을 했다.
집이 있던 터를 더 내려다보며 시동생이 말했다. 저쪽 울타리 아래로 길이 있었다고, 저 산 너머 동네 사람들이 장날이면 다 이 길로 다녔고, 학생들도 등하교도 이 길로 했다고.
시조모와 긴 수염의 시조부를 사진으로만 보았고 시조부는 대목수였다는 사실과, 아버님은 군산 비행장에서 비행기 정비사로 일하다가 어머니 친정이었던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시조부와 시아버님을 거쳐 형제들에게 손 솜씨가 내려왔나 보다고 했다. 시숙이 자기 손 솜씨는 동생들만 못하다고 했다.
나는 시부모님이 군산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를 시숙이 알고 있는지 물었다. ‘우리 친정 부모님처럼 6.25 한국전쟁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 내막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원래 독자가 아니었고 남동생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왜 집을 나갔는지, 엄동설한에 옆 동네 개천 다리 아래에서 동사한 이가 그분인 것 같다고 추측만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얘기도 좀 더 알고 있는지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모른다고 했다.
내가 결혼했을 땐 외딴집에서 동네로 내려온 지 여러 해가 됐었다.
그때 벽에 걸려있던 시조부모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챙겨둘 걸 이제야 후회하고 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나오신 어머니가 그 시절 세일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안방 벽에 걸려 있었던가 앨범에서였나 본 기억이 있는데 그건 어디로 간 걸까.
부모님의 윗대 또 그 윗대 조상들의 자료도 남아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나는 이제야 시댁의 자료를 모으며 뿌리를 알고 싶은데 자료도 정보도 영 제한적이다.
나는 자세히 알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늘 가장 멀리 사는 우리가 먼저 출발한다.
나이 많은 시숙이 나는 짠하다. 시숙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쓸며 말했다. “아주버님, 저희 올라갈게요. 드시는 약 잘 드시고요. 잘 지내세요. 또 올게요.”
그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가면서 음료수 사마시라며 맏동서가 내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주었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 자리 지켜내며 사느라 녹록지는 않았을 가족들 모두 애 많이 쓰셨다.
나도 남편도 42년 동안 우리의 자리 지키며 사느라 수고 많았다.
상행선 도로가 막힐까 걱정했는데 뻥 뚫렸다고 말하니 남편이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전쟁으로 기름 값이 많이 올라 사람들이 많이 나오질 않았나 보다고 말했다.
어머, 문득 마음에서 의심의 바람이 일었다.
‘우리가 출발하고 난 뒤 남아있는 그들끼리 모여서 나 모르게 봉투와 선물을 주고받는 건 아닐까. ’
이 기록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리의 어느 후손이 나처럼 선조들의 생활이 궁금해진다면 작은 자료가 되어도 좋겠다. 00 0씨 35대손 둘째 며느리가 연둣빛 버들가지 늘어지고 진달래 개나리 핀 어느 봄날, 선량한 형제들과 보낸 이틀 동안의 이야기가.
지금 마음에서 일고 있는 의심의 바람까지 기록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