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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Jun 28. 2023

                가족여행

   ‘가족여행’이라는 글제 옆에서 며칠 째 서성이고 있다. 우리 가족이 걸었던 인생 여행길엔 웃음이 없었고 늘 피곤했기에.


남편은 언제나 화난 표정으로 말이 없었고 결정엔 단호했다. 나와 아이들은 그런 그를 힘들어했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고독했고 같이 걷는 길은 울퉁불퉁 거칠었고, 그래서 각자 아팠다.

   

‘대체 왜 저러는지.’ 그가 출근하고 난 어느 날 아이들을 재워놓고 나는 아이들 곁에 누워 울음을 토해냈다. 저 남자 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건가, 왜 저렇게 말이 없나, 나에게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그를 향해 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터져 분출되니 울음은 그 솟구침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울었을까. 손도 까딱 못할 만큼 몸이 지쳐있었다. 그래도 아이들 자고 있을 때 집안일은 해놔야 되겠기에 비적비적 일어났다. 쓰레기를 버리러 현관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데 신기하게도 속이 시원하며 몸이 가벼워졌다. 눈물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던 봄이었다. 그가 조용히 밖에 나갔다 오더니 방 하나 더 있는 집으로 이사 가려고 우리 집을 부동산 중개소에 내놨단다.

   며칠 후 이사 갈 집을 계약하고 잔금 치를 돈이 조금 모자라 동생에게 빌려 이사를 마쳤다. 격일제 근무였던 그는 쉬는 날엔 육체노동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빚 갚는데 속도를 냈다.

   드물게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에 그는 집에서 종일 말이 없었고 어쩌다 나에게 던지는 말은 명령조였다. 그가 나의 고고함을 인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아 내 가슴은 그에 대한 불만으로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았다.


아이들은 그의 눈치를 살폈고 그가 무서워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아이들은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 와서 아빠 화났느냐고 귓속말로 자주 물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가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 거라고 대답은 했으나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어서 내 복장도 늘 터질 것 같았으니까. 나와 아이들이 한 편, 그 혼자서 한 편, 삼대 일의 구조로 우린 매일 소리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의 여행길은 늘 이렇게 전쟁 통이었다. 아이들은 아빠보다 엄마가 더 불쌍하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에게 아이들이 당신을 너무 무서워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 말은 예상대로 그에게 접수되지 않았다. 애초 그에게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애들을 때리기를 하나 왜 무서워하냐고 말했고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백번 얘기한대도 나와 아이들의 마음이 돌덩이 같이 딱딱한 그의 가슴에 녹아들어 갈 리 만무였으니까.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뒷산을 돌고 집 앞에 돌아왔을 때 그의 차가 서있으면 숨이 막혔다. ‘일이나 종일하고 밤늦게 들어올 것이지.’ 오늘 그의 침묵과 어쩌다 던지는 말투를 또 어떻게 견뎌낼까. 서있는 차의 뒤꽁무니가 미운 그의 엉덩이로 보여 거기에 대고 욕을 했다.

   



어느 날 그가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씻다가 욕실 문턱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아이들을 재우고 흘렸던 눈물보다 더 눌렀다 터진 울음 같았다. 집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찾는 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가 실제로 엄마를 부르며 운 것 같기도 하다. 그도 나처럼 외롭다는 걸 처음 알게 되며 당황했다. 그때 큰 아이는 제 방에서 책을 잡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제 방에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부은 눈으로 같은 시간에 출근을 했다.

   


이사 온 지 일 년이 됐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울고 각자 한숨 쉬며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몹시 불편해하던 빚을 다 갚았다. 그리고 얼마 뒤 어느 날 그가 퇴근해 오더니 어지럽다며 누웠다. 그는 직장에 출근은 잘했지만 쉬는 날마다 일찍 들어와 누웠고, 너무 힘들어 잠 잘 기운도 없다고 했다. 잠도 기운이 있어야 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같이 살며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의 마음만 몰랐을 뿐. 며칠을 그렇게 보냈을까. 그날도 일찍 귀가해 누워 있던 그가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쓰러졌다. 빚 갚느라 과로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일어난 사고였다. 그다음 날도 그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 씻고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출근했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흘렀다. 돌아보니 그의 삶은 오직 가족만을 위한 몸짓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날 때 건조한 방에 놓을 어항을 만들고, 베란다를 한참 바라보며 서 있다가 널려있는 집기들을 정리하며 청소를 하고, 내 친정 부모와 형제들을 챙겼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방 문 기둥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막대 자를 세워 이어 재며 전에 연필로 표시해 뒀던 키 자리보다 더 자라 더 높이 줄을 그으며 대견해하기도 했다. 그의 단호함 또한 옳은 결정 앞에서만  이루어졌었다. 물에 물 탄 듯 맹탕인 나는 결정 장애자인 걸.  그러나 나는 그의 침묵과 말투만을 잡고 늘어지며 나를 탈진시키느라 그런 그의 마음은 보려 하지 않았다.


버거운 가장의 책임을 다 하려 기를 쓰느라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겪은 그의 외로움은 내 것과 다르고 내 것보다 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를 못 견뎌하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못 견뎌 한 건 아닌지.  

   



나 이제 지난날 그의 고독을 안고 이 길을 걷는다. 그가 말했다. 아이들 어릴 때 보듬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땐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노라고. 나는 그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전해준다. 문자로, 말로.

   아이들이 제 아버지를 나에게서 받아 안고 같이 걷기 시작한다. 실은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제 아빠를 품에 안은 채 걷고 있었다. 남편의 탈진이 오래 지속돼 집에서 영양 주사를 맞으며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에서 귀가한 아이들이 “아빠 불쌍해..” 하며 울먹였으니까.

   

얼마 전 이웃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내가 예전에 이 사람한테 참 못된 놈이었지요.” 그 순간 삼십 년 전, 현관문을 열고 내려다보고 서 있던 나를 올려다보며 난간을 붙들고 창백한 낯빛으로 퇴근길 계단을 힘겹게 오르던 그의 모습이 어제 본 듯 선연했으나 나는 표현현하기 남세스러워 말하진 않았다.


부러질 듯 팽팽했던 나의 긴장과 무지에도 힘들었을 아이들에게 슬며시 용서를 청한다. 고백은 늦은 때란 없기에. “엄마두 엄마가 처음이라..”

   

미안함과 연민으로 우리 가족은 저물녘 여행길을 같이 걷고 있다.  길에서 함께 바라본 저녁 노을빛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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