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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y 16. 2023

스무 살의 고향 쉐난도

    음악이 없다면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건너기 힘들었던 강은 스무 살의 강이었다. 영혼이 생지옥이었던 시절, 늘 두통이 따라다녔다. 대학을 못 들어갔고 재수할 상황도 안 되는 백수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한심한 내가 싫어 수백 미터 굴을 파고 수 없이 나를 묻었다. 모두가 손뼉 치고 웃는 모습을 봐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고, 꽃과 경치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감탄을 해도 공감할 수 없었다. 사지 멀쩡한 청춘이 차라리 부담이어 가슴만 쳤을 뿐.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듣던 노래에만 공감할 수 있었다. 노래는 그때 내가 안고 있던 불안들을 잠시나마 재워주었기에. 그중 제일 와닿았던 노래가 해리 벨라폰테가 부른 ‘쉐난도’였다. 영어가사의 내용은 모르지만 가수의 목소리와 곡만으로도 얼어있던 심장이 솜사탕처럼 녹으며 그 안에서 휴식할 수 있었다.       

   


   

그 해에 강남에 있는 부동산 중개소에서 일을 하게 됐다. 강남 개발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곳은 ‘00 개발’이라는 간판을 달고 주로 땅을 소개하는 곳이었다. 신축한 단층 건물에 두 개의 중개소가 세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중 한 곳에서 일을 했다. 주변은 대부분 공터였고 드문드문 주택이 지어지고 있었다. 강남이라 하지 않고 영동이라 불렀던 그때 그곳 바람은 내가 살던 뚝섬에서 부는 바람보다 황량했다.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14번 버스는 어깨에 가방을 멘 노무자들을 아침저녁으로 가득 싣고 달렸다. 그 차는 은마아파트를 짓고 있는 현장을 경유하는 버스였다.

   물 여덟살의 사무실 젊은 사장은 운전기사를 두고 빨간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 땅을 사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미스 박으로 불리며 아침에 출근해 사무실 청소를 하고 땅을 문의하거나 계약하러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타서 탁자에 놓아주었고, 구청이나 등기소 등에 심부름도 다녀오곤 했다. 한가할 때 사무실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몸집 작은 중학교 동창생이 키 큰 남자친구의 팔에 귀엽게 매달려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여자 교감 선생님이 몇몇 남자 어른들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며 옆 중개소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높은 계급의 미군과 결혼한 어느 한국 여인은 길이가 길고 날개 달린 차에 파란 눈을 가진 다섯 살 딸을 태우고 지나가다가 우리 사무실을 자주 들렀다. 그녀는 적당한 땅이 나온 게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주변 땅을 계약하기도 했다. 손수 운전하는 그녀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어느 날 사장의 외삼촌이란 분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성이 임 씨인 그는 학자 타입이었다. 사십 대 중반인 그는 늘 흰 와이셔츠에 곤색 바지 차림으로 외모가 깔끔했고 늦장가를 들어 아이가 어렸다. 나는 그를 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달째 출근은 하는데 실적이 없었고, 그러니 조카인 사장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생활도 퍽 곤궁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은 냄비 등 주방기구를 가져와 자신의 형제들을 그리로 불러 장사를 하는데 형편이 어려울 때 형제가 도울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형제들은 열심히 설명하는 그를 보며 웃기만 할 뿐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동산 중개 일도 그릇 장사도 그와는 맞지 않아 보였다.

   

사장은 자신의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임 선생은 사장에게 당장의 생활비를 부탁하기도 했으나 사장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재산이 많으면서 그곳에 놀러 와 화투도 치고 놀다 가는,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손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사장에게 땅을 사고 팔 사람을 자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하루는 그와 임 선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됐다. 사장은 자기의 외삼촌인 임 선생 편을 들지 않고 금전적 이익을 주는 손 선생 편을 들었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나는 손 위의 핏줄도 배신하게 하는 돈의 속성에 무척 놀랐다.

   

어느 날 사무실에 임 선생과 둘이 있게 됐다. 꽤 넓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작았지만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노래였다. 그때 나도 좋아하고 있던 노래  ‘쉐난도’였기에.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던 작은 영어사전을 꺼내 ‘Shenandoah'의 뜻을 찾아봤다. 그는 얼마 전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어느 여성청취자가 이 노래를 신청하며 함께 보낸 사연을 얘기해 줬다.






생전에 이 노래를 좋아했던 그녀의 언니와 형부 이야기였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를 대신해 그녀를 공부시켰고 이 노래를 좋아했던 언니가 결혼 후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언니를 많이 사랑했던 형부가 그녀의 결혼식에 왔을 때 그녀는 형부에게 재혼을 권했고 형부는 재혼하지 않을 거라며 쓸쓸히 웃고 돌아가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임 선생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노래를 또 나직이 불렀다. 잔인한 삶의 소굴에서 아름다운 사연 속으로 숨으며 나는 잠시 안도했다.

   그는 나에게 미스 박은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라고 했다. 자신은 돈이 없으니  처자식 고생시키고 조카에게도 이렇게 홀대받는다면서.

   며칠 뒤부터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나도 몸이 좋지 않아 몇 달 그곳을 그만두게 됐다.  

 


   

칠 년 후 나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단칸방 신혼생활이 달달해서, 육아서적을 보며 그대로 아이를 키우느라, 맹자엄마 흉내를 내느라 쉐난도를 잊었다. 두려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흙바람 이는 벌판을 맨발로 질주하느라 쉐난도를 잊었다.

   

 



이제 세상이 많이 변해있다. 라디오 음악 프로가 아니어도 영어가사에 대한 한국어 해석까지 휴대폰 화면으로 제공되는 노래들을 접하는 시대가 돼있으니까.

   며칠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쉐난도를 만났다. 별 내용이 아닌 가사에는 조금 실망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임 선생이 생각났다.  중년이었던 그는 아직 세상에 있을까.   


 그의 노래를 들으며 찾아봤던 영한사전에 ‘Shenandoah’는 인디언 추장 딸의 이름이고 인디언 말로는 ‘별들의 딸’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사십 오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의 쉐난도를 노트북에 기록한다.

   

‘나의 쉐난도는 영동의 시린 바람이다. 쉐난도는 나에게 가장 미안했던 스무 살 시절의 고향이다’라고.       


https://youtu.be/Bh0Yf2BUH_w?si=Ny_JThm94ycRcXJ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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