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봄비예요.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에서 노닐다가 ‘봄비’로 개명하고 아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산으로 가봤어요. 사랑하는 건 애타는 일이기도 한가 봐요. 진달래가 신열이 끓어오르는 몸을 주체 못해 분홍 반점들을 피워내고 있네요.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짚어주었어요.
저기에 입 무거운 목련이 보이네요. 나는 몰래 등 뒤로 다가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질였어요. 그녀가 깜짝 놀라곤 웃음을 터트리네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갑자기 웃을 일이 많을 것 같아요.
강가를 둘러봤어요. 언덕에서 벚꽃 잎들이 작은 손을 흔들며 떠나고 있네요. 나는 쫓아가 그녀들과 악수했어요. 인생은 잠깐이니 가볍게 살라고 그녀들이 당부하네요.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이기도 하군요. 벚꽃 떠나니 배꽃이 오고 있어요. 나는 반가워서 그녀들을 안고 얼굴을 비볐지요. 그러나 만남은 다시 이별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한가 봐요. 배꽃이 조잘대네요. 자기들도 잠시만 머물다 떠날 거라고. 다음엔 조금 더 큰 철쭉꽃이 찾아올 테니 미리 슬퍼할 건 없다고 그녀들이 다독입니다.
동네로 내려가 어느 집 울타리를 들여다보니 노란 저고리에 초록 치마를 입은 수선화가 고개를 숙인 채 살랑대네요. 살며시 안으로 들어가 말했어요. “너 참 예쁘다.”고. 그러자 그녀가 속삭이네요. 자기는 칭찬을 경계한다고. 칭찬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자만을 낳고 자만은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가 된다고. 맞아요, 짧은 인생에서 빛나는 젊음은 한 순간인데 지금을 자랑한다면 영원히 아름다워야 하는 숙제를 자신에게 주는 거니까.
관계는 어쩌면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이웃 텃밭으로 가보니 땅 아래서 기를 쓰고 올라오는 샴쌍둥이 감자 싹과 그들을 올라오지 못하게 엉덩이로 누르고 있는 흙더미와의 한 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네요. 흙은 감자 싹이 땅 속에 있을 때 온기를 보듬고 어서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주었던 은인인데.
감자 싹이 치열한 밥벌이 싸움에선 은인도 잊은 모양이고, 흙은 그들이 막상 치고 올라오니 불안한가 봐요. 싹은 더 세게 흙더미를 밀어 올립니다. 흙더미는 더 절박한 감자 싹 위에서 쪼개지며 기우뚱대더니 쓰러지네요. 나는 얼른 가서 양 편 모두 목욕을 시켜 주었어요. 저들은 과연 화해할 수 있을까요.
이리 저리 다니며 세상 경험 많이 했네요. 이별과 만남을 겪으며 또 다른 이별을 확신했고, 열병의 징후와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도 보았어요.
여기에서 오래 머물며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지만 이제 떠나야 해요.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이유를 묻지 마세요. 아니 실은 그대들에게 은밀히 할 말이 있어요. 나는 두려운 거예요. 어느 순간 내가 난폭해져 폭우로 변해 꽃들과 여린 잎들을 다치게 할까봐서. 그러니 지금 사라질게요. 혹시 갈증이 심해지거든 연락 줘요. 그때 다시 다녀갈게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