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장사꾼 : 묵언수행하는 이상한 상인
어린 시절 방학만 되면 참 심심하고 외로웠다. 친구들은 모두 학원을 갔지만, 우리 집은 학원 다닐 형편이 안 됐다. 심심해하던 중 아버지가 장사를 나가신다 했다. 안된다는 것을 조르고 졸라 아버지의 장사에 따라갔다. 초록색 봉고 승합차를 타고 경기도 모처에 좌판을 깔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이소의 노점상 버전. 길에서 생활잡화를 파셨다. 이때 다이소를 먼저 창업했어야 했는데 용기가 없었다.(웃음) 아버지는 묵언수행 하듯 소극적으로 장사를 하셨는데 역시 매출이 안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봉고차 안에서 곰곰이 혼자 생각했다. "왜 안 팔렸을까?" 초등생인 내가 보기엔 물건이 별로였고 아버지의 장사 수완도 좋지 못했다. 장사꾼이 묵언수행을 하려면 절에 가셨어야 했다. 혼자서 생각했다.
"아빠는 크게 좀 소리치시고 홍보를 하시지... 왜 조용히 장사를 하실까?"
2대 장사꾼 : 입답이 뛰어난 천재 장사꾼
세월이 흘러 초등학생은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은 생활고를 이기기 위해 닭꼬치 노점상을 차렸다. 3년간 정말 미친 듯이 닭꼬치를 팔았다. 무엇보다 "사 먹어야 하는 이유"를 피를 토하듯 외치며 스토리 있게 장사했다. 1대 장사꾼이 항상 "아빠보다 성공해"라고 하셨는데...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1대보다 업그레이드된 2대 장사꾼의 영업력을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식 잘 되는 것을 질투하지 않을 유일한 존재는 부모일 텐데... 유독 아버지가 그립다.
2대 장사꾼은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24년 봄 친한 지인들과 함께 가족 단위로 플리마켓 장사를 했다. 집집마다 안 쓰는 물건들을 모아 왔고 수익금은 전액 어려운 이웃에게 흘려보냈다. 주력상품은 친환경 수세미. '수제'라는 말이 식상하면서도 묘한 힘이 있다. 왠지 더욱 정성스러울 것 같은 뉘앙스. 우리도 수제로 수세미를 만들었다. 이 장사에 나의 아들도 동행했다.
플리마켓 전경
"시원아! 아빠 대학생 때 장사해서 TV도 나가고 유명했던 거 알지? 아빠가 먼저 수세미를 팔아볼게!"
"친환경 수세미가 단 돈 1,000원!"
"대한민국 최저시급 1만 원 시대에 밤을 새우며 만들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 보는 이상한 장사!"
"자자 손님들! 원가도 안 되는 수세미 사세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구름을 부르는 남자는 손오공처럼 용감해졌다. 근두운을 외치는 손오공이 되어 자신 있게 수세미를 사라고 외쳤다. 문전성시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지인들의 말로는 장사꾼의 멘트가 기발하고 재밌다고 했다. 같이 장사를 시작한 이웃 가정들은 천재 장사꾼의 멘트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기와 진실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중독성 있는 멘트랄까? 장사를 하는 건지 장기를 부리는 건지 몰라도 수세미는 금세 완판 됐다. 갑자기 고민이 밀려온다.
"수세미는 다 팔았는데 이제 뭘 팔지?"
그때 아이들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싼 값에 가격을 책정해도 잘 팔리지 않았다. 저 신발을 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맞다! 역시 스토리가 필요했다. 시끄러운 길바닥에서 1분간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고 스토리를 완성했다. 드디어 멘트를 완성하고 혀에 한발 장착했다. 방아쇠로 주옥같은 멘트를 발사한다.
지인과 우리 집 아이들이 신은 신발
"키 크는 신발 사세요! 이 신발을 신은 아이들이 모두 키가 커요!
(신발을 기부한 가정의 아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키가 컸다)
"아이들이 키가 콩나물처럼 자랍니다."
"(옆집 아이를 가르치며) 이 녀석이 6살인데 믿어지세요? 8살 체격입니다."
"키 크는 신발 사세요"
모든 상품에 스토리를 붙이기 시작했고 주력 상품마다 완판 시켰다. 손님들이 나의 장사를 보고 재밌다고 빵빵 터진다.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도 웃으며 손주를 위한 신발을 사가신다. 1대 장사꾼의 소극적인 장사가 제법 괜찮은 2대 장사꾼을 만들어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3대 장사꾼 : 장사에 재능을 보이는 초등학생
아빠의 멋진 장사를 지켜보고 입이 근질근질한 어린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은 초등학생 큰 아들. 표정을 보니 아빠처럼 장사를 잘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 아빠가 널 3대 장사꾼으로 키워줄게"하고 결심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파는데 신통치가 않다. 결국 의기소침해질 때 아빠 출동!
"시원아! 물건 파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지?"
"네 맞아요 아빠. 잘 안 팔려요."
"물건을 팔 때는 스토리가 매우 중요해"
"예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야. 태풍이 와서 사과 농사를 망쳤는데 살아남은 사과가 소량 있었, 그 사과를 엄청 비싸게 팔았는데 어떻게 팔았는지 아니? 바로 '태풍을 이겨낸 특별한 사과'로 팔았다는 거야. 감동적이지? 결국 스토리가 중요한 거야. 아빠도 지금 파는 상품 하나하나에 스토리를 붙여서 팔고 있어"
"아빠 알겠어요! 스토리를 만들어 볼게요!"
아빠의 장사를 관찰하며 모티브를 얻었을까? 3대 장사꾼의 눈에 힘이 생겼다. 딱 봐도 팔기 어려워 보이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골똘히 바라본다. "아들아 그건 잘 안 팔릴 것 같아! 다른 물건 팔아볼래?"라는 말이 목구멍을 지나 혓바닥에 장전됐지만, 창의력 교육을 중요시하는 아빠는 참아냈다. 플라스틱 케이스를 보며 '포켓몬카드 정리함'으로 변신시키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냈다.
정리함의 용도를 고민 중인 초등생 3대 장사꾼
아빠를 닮아 관종력 넘치는 아들은 결국 스토리를 만들었다. 멘트를 완성하고 혀에 한발 장착했다. 방아쇠로 멘트를 발사한다.
"포켓몬 카드 정리함 사세요. 신용카드 넣어도 됩니다."
처음엔 웃겼지만, 아이들의 눈높이까지 공략한 훌륭한 스토리였다. 실제로 플리마켓 현장은 가족단위 참석자가 대부분이라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상상력이 지나쳤을까? 수요가 없는 물품이었을까?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지나가는 친구한테 사이비 포켓몬 정리함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막판에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덤핑정책은 아쉬웠지만, 초등생이 고민한 흔적이라 하면 매우 흐뭇하다. 이 정도면 묵언수행 하던 1대 장사꾼이 하늘나라에서 함박웃음 지을 일이다.
여기서 큰 반전!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이 판 정리함은 거스름돈을 보관하러 갖고 온 '장사 소품'이었다. 아들은 '화분 받침'을 '강아지 밥그릇'으로 격상시켜 판매한 격이다. 훌륭한 도전이었다. 역시 장사꾼의 아들답다.
아들과 함께 플리마켓에서 장사하는 그날의 경험은 잊지 못할 것이다.
행복했던 아빠와 아들의 장사!
우리 집은 재벌 3대 부럽지 않은 장사꾼 3대.
아들아! 너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봐.
사람들은 너만의 스토리를 좋아한단다.
너 다운게 가장 멋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