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와 맞바꾼 고급 아파트 5채

길룡이는 미국 건설 현장서 번 돈 아파트 5채 값을 허세로 다 날렸다

by 감동의 날

7.11 편의점 앞에서 질롱 진을 만났다.

우리 말로는 김 길룡인데 중국어로는 질롱 진이라 해 어쩔 땐 그렇게 부른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하니 힘없이 그냥 그럭저럭 지낸다고 했다.

10여 년 만에 만난 그도 많이 늙어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반백이 되어 있었고

눈도 더 나빠졌는지 안경도 도수가 상당히 높을 거 같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있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도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에 들어온 걸로 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떳떳하게 미국 공항을 통해 들어왔지만,

그는 캐나다 국경을 통해 밀입국한 것이 나와는 입국 형태가 확연히 달랐다.

미국에 입국한 즈음 그와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그의 아파트에서 붙어 지냈다.

그가 렌트해 사는 아파트는 같은 단지 내여서 걸어서 10분이면 도달할 거리였다.

나이도 동갑이고 가족 친지를 떠나 타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마음이 정착이 안되어

서로 적적하던 처지인 데다 나는 술 마시고 운전을 안 해도 되어 토요일마다 만나서 술을 마셨다.


만나는 횟수가 많아짐에 서로 흉어물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고민이나 가정사 애기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됐다.

중국 선양에 살고 있는 가족은 90이 넘은 할머니와 나이가 일흔 동갑인 부모님과 처와

중학생인 아들이 한 집에서 같이 산다고 했고 결혼한 여동생 둘이 있다고 했다.

자기 말로는 학력은 중졸이고, 초 중학교 때 학교 대표 중 장거리 육상선수를 선수를 했고

공부도 잘했다고 했다.


직업군인으로 퇴직한 아버지는 자기처럼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을

자기는 군인이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왔다 했다.

집을 나와 식당에서 주방일을 배웠고 조그마한 식장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가는 바람이 불어 한국에서 5년을 살았다고 했다.

한국 건축 현장에서 5년간 1억여 원을 모아 자기가 가는 중국 선양에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서도 한국에서처럼 알뜰히 돈을 모았으면 노후에 돈 걱정 없이

가족들과 편히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허파에 바람이 들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놈의 허세 때문에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나는 그때 일당을 120$쯤 받았는데 그는 하루 일당을 250$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 게 건축 외장 공사(사이딩)를 하는 그의 오너가 장비하고 차만 있지

기술이 전혀 없어서 그가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그 일당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도 한구에서 5년쯤 목수경력이 있었고 손재주가 좋아

일하는 집주인마다 그의 솜씨 있는 일처리 결과를 보고 매우 만족해했다.

그래서 일거리도 남들보다 많아서 노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대학졸업하고 제일 인기 있는 직업이 은행원인데

은행원 월급을 달러로 환산하면 그의 하루 일당인 250$이라고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갈 거 같다.

한국에서 대졸자가 은행에 취직하면 기본급이 300만 원이라고 치면

미국에서 하루에 300만 원씩 번다고 하면 얼마나 큰돈인가,

그 당시 그 돈을 중국으로 부치면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난 술 먹을 때마다 말했다.

"야! 길룡아!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지금은 건축경기가 좋지만,

이 호황도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니 지금 돈이 벌릴 때 악착같이 벌어

돈을 모이는 데로 중국으로 송금해라.

그래서 건물 같은 거 사서 너 편안히 살 노후 준비하라고"...

그때 중국은 막 개방화가 되면서 사유재산이 인정이 되던 때였다.

처음 몇 달은 3.000$씩 착실하게 돈을 보낸다고 했다.

그가 어느 날부터 급격히 타락하기 시작했다.

난 술을 먹을 때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집에서 기다리는 처 자식과 부모님들을

생각해서 빨리 돈 모아서 돌아가야 할 거 아니냐고 하며 진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

그는 나의 충고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꾸 충고를 해도 이미 집이 하나 있는데 무슨 집을 사냐며

시큰둥하며 내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나는 한참 잘못되어 가는 그의 행동을 잡아 보려고 자꾸 충고를 하다 보니

그와 자주 언쟁을 하게 됐다.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진심 어린 충고에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가 주는 것 없이 밉고 답답해서 일부러 만남을 피하다 보니,

만나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다 나중에는 거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주말마다 술집에 가서 몇 백 불씩 펑펑 쓰고 다니며 술집에서

밤을 새우며 보낸다고 했다.

내가 자기 집에 발걸음을 끊고 놀러 오지 않으니 한 번은 자기가 우리 아파트 앞에서

전화를 해 좀 보자고 나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야 고 하니 자기가 그렇게 사고 싶었던

미국 지프(Jeep)사에서 생산되는 채로 키(Cherokee)라는 튼튼한 SUB 중고차를

현금 25.000$(약 3천만 원) 주고 살 f려고 하는데 자기는 차에 대해 잘 모르니

나한테 중고차 시장에 같이 가서 차 좀 보아 달라고 했다.

나는 "야, 길룡아! 차는 말이야, 네가 아무리 조심히 쓴다 해도 년수가 지날 때마다

감가상각비 때문에 값이 팍팍 깎이는 거야.

그러지 말고 일제차 중고 한 2.500$(약 300만 원) 주면 사는데, 네가 살려는 차의

10분의 1의 돈으로 도요다나 혼다 일제 중고차 사면 고장도 잘 안 나고 유지비도

채로 키에 비하면 훨씬 적게 드니 일제 중고차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너의 가족이 사는 선양에 18평짜리 아파트 미화로 20.000$이면 산다며,

내 말 듣고 3.000짜리 차사고 나머지 남은 돈으로 아파트 한 채 사라고 했다.

또 시큰둥하더니 내 말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그 돈 주고 지프차를 샀다.

그 후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술집에 다니는 키가 크고 늘씬한 한국 아가씨를 하나 사귀어

살림을 차렸다느니, 조금 있으니 그 늘씬한 아가씨와 헤어지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와

동거한다느니 하며 건축 호황기 3년의 시간을 그렇게 어영부영 다 흘려보낸던 거 같다.

설상가상으로 같이 일하던 오너가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내 말 듣고 버는 대로 중국에 돈 보내 아파트를 샀으면 그는 3년 동안 최소한 대 여섯 채는 샀을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 당시 2만$이던 아파트가 10년 만에 일곱 배쯤 올라 15만 불 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노후가 이렇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된 것은

돈 떨어지면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놈의 허세 때문이었다.

믹구로 돈 벌러 온 조선족 주제에 하얀 백바지를 입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허세는 그를 그렇게 처량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 가족 친지 친구 떠나 낯선 타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낭인이 되고 말았다.


커피잔을 들고 7.11 편의점 앞에서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처는 집을 나가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고,

자기 닮아 키 크고 잘생긴 아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주식에 빠져 집이 은행에 넘어가 어디 시골에 가서 산다고 했다.

길룡이가 "야! 그때 신! 네 말 듣는 건데 그땐 마귀가 씌었던가 보다" 했다.

나는" 야, 길룡아! 다 지난 일이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건강이나 잘 챙겨라"하고 헤어졌다.


헤어져 차을 운전 하여 집으로 오며 남의 말 못 믿고 자꾸 의심하는 사람을

울는 보통 "자식이 중국 놈 빤스를 입었나" 하고 빈정거리는데,

길룡이 저 자식 보니 틀림없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집도 없고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중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국제 거지꼴이 되어 저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 김 길룡이가 참 안 됐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행실은 미웁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조만간에 전화해서 불러내

따뜻한 저녁밥이라도 한 끼 사 주며 위로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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