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잠시 멈춤(Pause)

여백이 주는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

by 여문 글지기

정해진 일과가 있던 일상에서 온전히 내가 전체 시간을 결정해야 하는 시점으로 다시 들어섰다.

일상이 온통 여백으로 바뀐 느낌이다.

한때는 꽉 들어찬 일상이 버거워서 여백을 원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여백을 채울 무엇인가를 다시 원하게 되었다.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美)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는데, 그래도 여백은 중심 주제를 돋보이게 할 때 더 중요하다.

인물 사진을 촬영할 때 피사체가 되는 인물(들)이 잠시 멈추는 것을 포즈(Pause)라고 한다.

오래 남게 될 소중한 순간을 제대로 남기기 위해 잠시 멈춤은 중요하다. 자연스러운 사진을 원할 때는 움직이는 중에 찍는 게 더 좋겠지만 포즈를 취한 후에 찍어야 하는 사진도 있다.

사진을 보며 당시의 추억에 잠시 젖으며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도 포즈의 효과이다.

퇴직 후 다시 일자리를 가지기 전까지의 기간을 인생 중의 잠시 멈춤, 포즈라 여기고 싶다. (일을 다시 가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잠시 멈춤이 있어야 과거를 돌아볼 수 있고, 현실의 나와 미래를 객관화하면서 내다볼 수 있다. 지난날의 나는 이런 잠시 멈춤을 잘 알지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건 사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퇴직 후 멈춤이 온전히 내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여백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 사실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후회 속에 남지 않게 하고,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 않게 해 준다.

매 순간이 내가 일한 만큼 소중했듯이, 내가 맞을 미래도 소중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 멈춤이 있으니 여백에 작은 점을 찍고 선을 그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 무엇에 도움이 되고, 무엇을 위한 목적이 있는 책 읽기가 아닌 그저 눈이 머무는 책을 오래 같이 할 수 있다. 작가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들인 노력과 정성을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잠시 멈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잠시 멈춰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한때 가까웠던 사이였더라도 일상이 서로 달라 못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SNS에서 소식을 접할 수 있으니 딱히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이제는 소중했던 순간들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작은 소식도 꼼꼼히 읽고, 마음을 담아 댓글을 쓰기도 한다. 여백에 점 하나가 새로 생겼다.

하지만 여백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림이 될 수 없다.

잠시 멈춤이 영원히 정지하는 걸로 끝난다면 여백은 자기만의 세계에만 한정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잠시 멈춤이 그야말로 포즈로만 끝나기를 바란다. 포즈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면 충분하다.

미래 어느 순간에 돌아볼 때 오늘의 잠시 멈춤이 미소와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지금 바깥은 한파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추위를 이기고 밖에 나가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돌아올 따뜻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고,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머지않아 봄이 오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면서 여백을 제대로 보고 즐겼으면 다시 점과 선을 긋는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