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 간에도 대화는 필요하다.

MZ세대 아들은 조언을 바라지 않는다.

by 여문 글지기

어디선가 본 ‘까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야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거닐던 중에 아버지가 앞에 날고 있는 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날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들이 대답했다. “까치예요.” 근방에는 까치들이 여기저기 날고 있었고, 아들은 무뚝뚝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다시 옆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은 무엇이나?”

아들은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한다. “저것도 까치잖아요.” 왜 같은 질문을 하는지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머리 위를 지나가는 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은 또 무엇이나?”

아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왜 자꾸 같은 것을 물어보세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치매 걱정을 했으려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말씀하신다. “어렸을 적에 너는 열 번도 넘게 같은 것을 물어보았고, 나는 모두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너는 세 번도 대답해 주지 않는구나.”

아들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치매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긴 것이겠지.)




아내와 함께 고향집에 가면 아버지, 어머니께 큰절을 드리고 마주 않는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가 바쁘게 두 분의 질문세례가 시작된다. 한 분씩 묻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나와 아내를 향해서 각자 궁금하셨던 말들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말씀하시면 좋을 듯도 한데 그런 것은 모두 무시하신다. 아들에게 물으시고는 며느리의 답에도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며느리의 답에 말참견을 하시기도 하신다.


사실 궁금한 것은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전화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거나, 같은 내용의 반복일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물으시고 나는 꼬박꼬박 모든 질문에 답해 드린다. 두 분의 질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나씩 말씀드린다.


부모님들은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저 대화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모처럼 방문에 질문부터 하시는 부모님들의 가슴에 지금보다 젊었던 나는 아픔을 드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처가에 가도 마찬가지다. 인사를 마치면 사위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도울 수도 없고 그저 거실의 소파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음식 장만에 대한 코칭이 끝난 장모님께서 간단한 먹거리를 가지고 오셔서 말씀을 시작하신다.


장모님의 대화는 거의 일방통행이시다. 장모님은 말씀하시고 나는 호응하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는 정도가 전부이다. 장모님 주변의 인물들과 일들은 나에게는 생소한 부분이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사투리도 이해의 폭을 줄이는데 한 몫 한다. 그래도 조용히 듣는다.


그동안 막혀있던 말들을 하시는 것인데, 사실 사위에게 말하는 것은 벽에다 이야기하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 말씀하시는 내용의 대부분을 사위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알 필요가 있는 내용도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속이 좀 후련해지시기를 바라면서 듣고 호응하려 애쓴다. 효도는 어렵고 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들과는 한 집에서 살면서도 대화하기가 어렵다. 평일에는 생활리듬이 달라서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고, 퇴근 시간도 불규칙적이어서 그저 지나가는 말을 나누는 것이 대부분이다. 휴일에도 크게 다르지 않고, 이런 상태가 상당히 길게 이어지고 있다.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살고 있는 둘째와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생활이 전혀 달라서 화제로 삼을 수 없고,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평소의 대화이고, 어쩌다 집에 와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고향에 가면 부모님들께서 질문을 쏟아 놓으시는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사실 아들들은 부모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조언해 줄 것도 딱히 없다. 회사 내의 일들을 세세하게 물을 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일로 조언하기도 어렵다. 유일한 조언거리인 결혼에 대한 것은 극히 꺼리는 주제가 된지 오래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하면서 지켜볼 뿐이다.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내 친구 한 명이 같이 근무했었다. 그 친구는 반가움에 아들을 불러서 식사를 하면서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심정을 이야기한 것 같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아들은 소위 ‘꼰대’의 말로 치부하고 깊이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다. 표현은 않지만 내 이야기도 같은 수준이지 않을까.


시니어들은 경험과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 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프리카 속담에 ‘현자가 한 명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 특히 지금의 MZ세대들이 모두 공감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세대차이가 발생하는 것인가 보다.


아내는 아들과 이야기를 자주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지금도 하지 않으면 결혼하여 분가 후에는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감할 것이 많지 않고, 들을 준비가 덜 되어 있는 아들과의 대화는 갈수록 어렵다.


그나마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다행이다. 나이가 많아지는 것이 그래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50세를 넘기면서 젊은 시절에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장자’가 이해가 된다고 한다. 공자님도 나이 예순을 귀가 순해지는 ‘이순’이라고 했다.


때로는 먼저 다가가고, 때로는 지켜보면서 기다리면서 대화를 늘려가는 노력을 해야겠다. 집안에서 소통을 못하면서 사회와 교류하고 협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