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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26. 2022

극부부도#12.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나 죽거든.. 장례문화에 대해


1.


밀레니엄을 앞두고 나의 친할머니는 드라마틱하게도 21세기를 거부하신 채 영면하셨다.

오랜 기간 여러 성인병으로 고생하셨던 터라, 할머니께선 오래 못 사실 거란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에 심리적 완충장치가 됐던 걸까, 철없이 대학생이 된다는 흥분감 때문이었을까? 좀처럼 눈물이 나지 않았다.

길이 3mm 정도의 반삭발(Buzz cut) 상태로 노랗게 탈색한 내 모습이 장례식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기분에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김치를 담그실 때면 양념 맛을 본다며 맨손으로 김치를 입에 넣으신 뒤, 다시 양념을 버무리곤 배추에 묻혀 쭉쭉 찢어가며 내 입에 넣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불결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 그런 기억 외엔 할머니에 대해 별달리 상기할 추억이 없었다. 김치는 손맛이라며 입에 넣어주시던 장면을 떠올리며 억지로 눈물을 짜나야 했던 내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장례식장을 몰래 빠져나와 손을 마주 비벼가며 녹인 뒤 라이터 부싯돌을 내리는데, 왜 그렇게 엄지손가락은 아려왔던 걸까.


할머니 장례식 이후, 우리 집안에선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릴 일이 한동안 없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며 최근에 주변 어른들께서 돌아가시기 시작했다.

2019년엔 외할아버지, 2020년엔 할아버지, 그리고 작년엔 큰고모가 돌아가셨다.


3년 연속 장례를 치르면서 어렴풋이 기억에만 존재하던 ‘선산’이란 곳에도 자주 가게 됐다.


우리 집안은 양가 모두 개신교라서 그랬는지, 성묘나 제사 등 조상에 대한 예가 매년 희석돼 까다롭게 따지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벌초 작업도 되도록 선산이 있는 지역의 먼 친척 되시는 분이 알아서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막상 묘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니 나로서는 오랜만에 구경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선산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경관이셨는데, 6.25 이후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됐다고 한다. 후방에서 총을 들고 따라나서 전방에서 벌어지는 총소리는 ‘귀’로만 들어보셨다지만, 당시 이 일로 표창을 받았다. 후일에 유공자로 인정받아 호국원 납골당에 50년간 들어갈 수 있게 되자 당신 스스로도 떨떠름해하셨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


할머니는 이미 20년 전에 선산에 묻히셨는데, 할아버지께서 선산이 아닌 보훈처에서 지정해준 납골당으로 가게 됐으니 묘를 파서 다시 화장을 해야만 했던 거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일 아닌 듯싶지만,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묘에 모신 조상의 유골을 꺼내 다시 화장을 하다니.

집안 어른들도 이견이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와 함께 납골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전에 말씀하셨다고 하니 그렇게 교통정리가 됐다.


할아버지는 중년이 되어선 할머니 병시중만 드시다가 홀로 되신 후엔 20년을 혼자 사셨다. 항상 할머니 얘기만 하시면 “다시 태어나도 할머니를 만나 같이 살겠다. 너무 일찍 죽어서 그게 한이다” 라시던 분이라 모르긴 몰라도 로맨티시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일조차 알 리 없는 이들이 염과 입관을 맡아 장례를 진행하는 상황은 미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진행자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유족들을 인도했고, 몇몇 절차에 따라 예를 표한 뒤 후 유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가족들은 온기가 사라진 할아버지의 딱딱한 손과 발을 어루만지며 감정에 북받쳐했다. 나와 바둑을 두던 그 작은 손,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둑알을 놓던 그 손 말이다. 고모는 통곡을 하기도 했고, 작은 엄마는 기도문을 읊었다. 이내 아랑곳 않는 진행자의 순서에 맞추느라 눈물을 급히 닦아내며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들이었다.


입관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갈 때엔 다음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화장도 마찬가지였다. 은행 대기표를 받아 들 듯, 우리 차례가 언제인지 전광판을 보고 있어야 한다. 태어나면서 시작되는 인생이란 공정, 숨이 끊긴 후 지구 상에서 재로 만들어버리는 순간까지 그 공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만 같았다.



2.


장례식장을 오갈 때마다 위화감을 느낀다. 조화가 늘어서 있지 않거나 조문객이 없는 상갓집을 ‘초라하다’, ‘쓸쓸하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 반면 위세 등등한 장례식장을 볼 때면 부러워하는 시선을 감지할 때 그렇다.


장례 문화 자체를 고깝게 볼 일은 아니다.

“정승집 개가 죽어도 초상집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우리 속담은 씁쓸한 풍자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죽은 사람을 보러 초상집을 가는 것만은 아니므로 당연지사일 수도 있다.

상갓집을 찾을 때엔 정녕 돌아가신 분은 내가 면식이 없을지라도 나의 지인이 겪고 있을 상실의 아픔에 위로를 전하는 것이니, 이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유명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교우 관계부터 시작해서 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이들이 넘쳐날 테고, 그 또한 그렇게 많은 상갓집을 오갔을 테니 답례 형태로 오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 집안의 위세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거나 그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세태를 당연시할 수도 없는 거다. 이 경우, 반대급부로 ‘초라하고 쓸쓸한 상갓집’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답습을 막기 위해선 나름의 기준을 정하면 될 일이라 생각한다.


극단적일 수는 있겠으나 내 경우를 소개하자면, 단둘이 밥 한 번 먹어본 적 없는 사이, 업무 외적으로 통화하거나 만날 일이 없는 사이에선 혼례와 상례를 차단한다. 청첩장을 받으면 축하한다고 말로 끝내고, 부고 소식도 넘긴다.

두 번의 조부상을 연달아 치르면서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에도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회사에는 조부상에 따른 사나흘 간의 업무상 공백을 알려야 했는데, 부고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회사 행정국 차원에서 장례 물품과 대표 명의의 화환을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이마저 거절했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고 나서야 주저하다 멋쩍게 전화를 걸어 다시 보내달라고 했을 뿐이다.


가족 밖에 없을지라도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는 방식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성이나 사회생활이라는 이유로 의무화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 하나 실천한다고 해서 문화 자체가 바뀔리는 없겠으나, 장례 문화는 점차 바뀌어 나갈 테니.



3.


이런 내 생각을 부모님은 기이함을 넘어 우려로 받아들이셨다.


“너는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는 거냐”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고는 있는데, 통념을 따르는 것 같진 않네요.


“네가 그렇게 부조도 안 하고 그러면 내가 죽으면 상갓집에 올 사람이나 있겠냐”


많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 아마도 초라하고 쓸쓸한 상갓집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자식을 잘못 키웠네. 불효라는 생각은 안 드니?”


어머니, 아버지.. 죽고 나면 누가 장례식 왔는지 당신들께선 당신 장례식을 볼 수도 없어요.


“늙으면 쓸쓸한 건데, 아빠 죽어서도 쓸쓸하고 내가 죽어서도 쓸쓸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슬프구나.”


아빠가 먼저 돌아가신다면, 엄마 친구분들이 와서 엄마를 위로해주시겠죠. 제가 느낄 상실감에 대해선 저와 가까운 사람들이 와서 손을 잡아줄 수도 있을 거예요. 과거엔 부모 사후 3년간 움막을 짓고 묘 옆에서 살았는데, 이제 사흘뿐이잖아요. 사흘이라도 제가 마지막까지 모시는데 충실하면 됐지, 조문객들 맞이하느라 정신없는 건 싫어요. 차라리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와 준 가까운 친구와 함께 자리에 오래 있는 게 낫죠. 그렇게 생각하면 쓸쓸할 게 뭐 있어요. 그리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고.. 아니.. 엄마랑 아빠는 천국 가신다면서요. 무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유한한 속세에서의 마지막 행보가 뭐 중요해요.


“뭐가 어찌 됐든 네가 밥벌이하고 사는 이상 조화라도 오면 다행이겠다.”


근조화환은 처음부터 다 거절할 거예요.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지 말고 그냥 집에서 하면 어떠한가 이런 생각도 하는데.


“아이고 무슨 장례식을 집에서 치르니. 썩어가는 시신 집에 둘 데도 없는데”


염을 해서 안치하면 사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뭐 그것까진 모르겠으니 일단 두자고요. 그냥 저는 공정처럼 장례식을 치르는 방식이 싫을 뿐이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추억하고, 고별사를 읊을 수도 있고, 엄마가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을 수도 있고, 내가 정할 수 있는 건데 왜 장례식장이 정한 대로 따라야 하는 건지, 고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식을 진행한다는 것도 불편하다고요.


“너 죽을 때 네 마음대로 해라. 내가 죽는데 내 마음대로도 못 하니”


성공하는 사람들은 반 발자국만 앞서 나간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게 내 문제인가 보다.



4.


말은 이렇게 했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장례식은 평범한 수순을 따르겠지. 그게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바라면, 그렇게 해드려야겠다.


다만, 아내나 나의 죽음에 대해선 우리 부부가 미리 합의해둘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와 생각이 꽤 비슷해 서로 맞장구를 쳐가며 얘기할 수 있다.


장례식 이후까지도 논의가 진행됐다. 나는 명확한 가풍을 새로 정립할 계획을 갖고 있어 신나게 아내한테 동의를 구했다.


일단 부모님께서 먼저 돌아가신다면,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수목장을 하되, 화장 후 유골 일부는 집에 모셔놓고 가족사진과 함께 집 한편에 모시자고 했다.


매일 아침 인사드리고 부모 생각하는 게 효도지, 멀리 있으면 지키기도 어려운 기일이나 명절마다 찾아뵙는 것보다도 하늘에서 살펴봐도 더 기쁠 일이 아닌가. 아내는 유골에서 벌레 생기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을 표했지만, 뭐 진공팩을 하든 부패방지 처리를 한 뒤 유골함에 봉인하면 되겠지. 정 걱정되면 유골은 됐고, 사진만 두고 기일에는 향 피우지 뭐. 우리 부모님만 하는 거 아니고 친정 부모님도 당연히 모셔야지.


요점은 가까이에 두고 추억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상례라는 것이 조상에 대한 감사의 표시와 잊히지 않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서 발로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이들한테도 위엄 있게 얘기했다.


“이 아버지가 죽거든, 나중에 엄마랑 같이 유골을 섞어서 하나의 유골함에 넣어라. 장례식은 너희를 위로하러 올 가까운 친구 정도한테만 알려라. 아빠나 엄마가 죽었다고 슬퍼할 친구는 알아서 찾아올 테니. 묘도, 묘비도 필요 없다. 유골함은 집 한편 볕이 잘 드는 쪽에 가족사진과 함께 두고, 엄마, 아빠가 좋아하던 노래 죽기 전 애플뮤직에 플레이리스트 남겨둘 테니 그걸 가끔 틀어두거라. 아빤 소주 못 마시니까 어디 드라마 같은 데서 보고 소주 부어주는 거 따라 할 필요없다. 차라리 부어준다면 니들이 마실 때 와인 한 모금씩만. 너희가 아이들을 낳고 손자를 볼 때까진 지속하여 하나의 가풍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희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이렇게 4명을 기리고 너희 자녀 대에 이르러서도 이런 식으로 최소 조부모까지 기리는 일이 지속되게끔… 블라블라”


기대와는 달리, 내 아이들은 뭔가 무섭고 부담스럽고 더러운 것 같다며 꽥꽥거리며 진절머리를 냈다.


아내가 말했다.


이순신 장군인줄~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며 장례식이고 뭐고  필요 없다더니 엄청 요구하는 것도 많네.

됐고! 엄마가 무조건 먼저 죽을 거니까, 니 아빠 하는 거 보고 따라서 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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