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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16. 2022

극부부도 #10.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야”

답 없다 참.


1.


나는 부모님과 말다툼을 피하지 않는다.


흔한 예로 “교회 다녀왔니?”라는 질문은 단순히 내가 예배에 참석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닐 것이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기 위해선 부모님 뜻에 따라 주일 성소를 꼬박꼬박 하면 된다. 그게 아니면 거짓말을 하면 된다. 그 중간쯤 어딘가엔 불성실함이란 카테고리가 있겠다. “바빠서, 이번 주엔 못 갔네요”라고 노력하고 있다는 시그널만 줘도 우리 부모님 성에 차는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교회에 나가라고 강요하지 말아 달라”라고 단도직입으로 ‘진돗개 하나’ 발령 즉시 때린다.


심지어 우리 부부에 대해선 포기하고, 손자 손녀라도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여 그것조차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종교는 허상이다’ 라거나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종교는 어린 시절 누군가의 인도 하에 하얀 도화지에 맹목적으로 쓰여선 안 되며,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선 간단하고 명료한 문제이나, 유일신의 존재를 믿고 성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평생을 믿고 살아오신 분과는 합의점이란 게 나올 수 없다. 신념에는 극단만이 존재할 뿐이다. 언성만 높아지는 결과의 과정을 꼭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후략…



2.


누군가 물은 적 있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냐고.

0.1초 만에 답할 수 있다. 응, 피곤하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각을 세우냐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때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게 현명한 게 아니냐고.


고부갈등을 대하는 바른 남편의 자세로, 여러 예들을 뭐라 뭐라 말한다.

이러한 각론들 한 데 다 모아서 사골 끓이고 나면 남는 코어는 이거다.


“어머님 말이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소.”


이쪽 얘기에 공감해주고, 적당히 저쪽 실드 치고, 저쪽 가선 저쪽 얘기 공감해주고, 이쪽 얘기 적당히 실드 치라는 거다.


난 싫던데? 무책임하잖아.

어떻게. 가족한테. 사랑하는 사람한테. 대충. 듣기. 좋으라고. 거짓말을. 해?



3.


대학시절, 남자의 여자의 커뮤니케이션 차이점에 대해 수강한 적이 있다.


여성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남성은 문제 해결 능력을 우선한다.


“나 오늘 남자 친구랑 싸웠어.”

“어머 너 오늘 기분 안 좋겠구나.” - 왜 싸웠는지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상태를 관찰한다.


“나 오늘 여자 친구랑 싸웠어.”

“왜?” - 얘기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을 수 있는지 해결하려 든다.


이 커뮤니케이션론에서처럼 남녀 차이는 뇌구조에서 온다라는 설명이 만약 ‘참’으로 증명된다면, 나는 남성의 전형인 게다.



4.


사람들은 인생은 훌륭한 문학과 영화를 통해 배운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것은 한 위대한 예술가가 장고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성찰로 낸 결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처럼 방황하는 영혼들은 그 형님 혹은 누님들이 내린 결론, “야 이건 이거야”라는 데서 무릎을 탁 치는 거다.


가령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을 보자(물론 원작 소설이 있지만 안 읽어봤기에).



‘아이들이 곧 미래입니다’ 참 오래되고도 단순한 명제라서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하지만, 이 명제를 갖고 내러티브를 전개해보라고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이를 안고 나올 때 주변의 반응들을 원테이크로 표현하는 걸 보며 휴머니즘과 희망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바로 ‘생명’이자 ‘아이들’이라는 것을 이렇게 유려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건가? 그저 눈물을 흘리며 살루-트를 외치는 거다.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며, 답을 추구하는 것, 어정쩡하게 회피하지 않는 삶의 자세, 정면 돌파 모든 것이 나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5.


며칠 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을 봤다.

여성들의 권력 암투… 이런 표면적인 분석은 됐고, 내 마음이 머물었던 대상은 단 하나의 대사였다.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야.”

그래, 이거야. 진실해야지, 사랑이란.


근데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든다.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라던 사라 처칠은 어떻게 됐다? 창밖을 바라보며 “여보, 멀리 여행 갈 준비해야겠어요.” 나가리됐다는 거다.



6.


란티모스 감독의 최근 3연작은 모두 내 인생 목록으로 꼽기에, 이 사람의 작품관에 대해 찬찬히 다시 생각해봤다.

대체 이 사람은 전달하고 싶은 게 뭘까.



 랍스터에선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조차 실은 인간의 본능 앞에서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말하고자 했던  아닐까. 눈알에 스테이크 나이프 꼽느니 그냥 랍스터가 되는 길을 선택하니까. 열린 결말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영화 크레딧을 끝까지 보라고 말하고 싶다.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있을 테니.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는 또 어떠한가?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모성애조차 죽음 앞에서라면? 일단 인류의 조상들이 제물로 자식 받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 아니었나? 작품 속 가족의 유대감이란 것이 설령 나의 가족과는 다르다고 믿을 수 있다. 나라면 총신 끝을 내 입 안에 넣고 방아쇠 당긴다고 믿을지언정, 곱씹어볼 만한 주제 아닌가.


‘더 페이버릿’을 다시 생각해볼까?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야”라는 게 진리라고? 그렇다면 진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대상의 감정은 깡그리 짓뭉개도 되는 걸까? 때로는 진실한 한 마디보다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보듬어 안아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진실함이 진리라고 확언할 수 없으니까.


불변의 진리라는 게 있는 것인지, 실은 그냥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 아냐?라고 대차게 물음표 기호 이마에 아로새긴 게 아닌가…



7.


‘유레카’


기쁜 마음에 맥주를 한 캔 따곤 잠을 청하고 있는 아내에게 달려가 신나게 떠들었다.


“쿠아론 감독과 같은 표현 방식은 내가 표상으로 삼아왔지. 단순한 명제에 이야기를 담아 풀어내는 것 말이야. 그 사람은 조잘조잘…”


“응”


“근데, 란티모스 감독 작품들은 태제를 비틀어. 진리가 어쩌고 저쩌고 조잘조잘…”


“응”


“세계관이 바뀌는 걸까? 그니까 전에 내가 한 말 생각나? 엄마한테 가선 엄마가 맞아요. 자기한테 가선 자기가 맞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마치 현명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 너무 싫다고 한 거. 나는 정확히 판단해서 답을 낼..”“아니 뭘 그리 장황하게 얘기해.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답이 어디 있어? 뭘 자꾸 답을 낼라고 해. 너나 잘하고 불이나 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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