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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13. 2022

극부부도 #NA ‘이 남자, 흉폭하다’ - 남편의 전쟁

넘버링에 부적합한 글이다

1.


대개 사람들은 공유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인터넷 회사에서 제공해준 번들 공유기를 쓰거나, 국민 공유기 iptime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게이머들이라면 공유기에 민감한 경향이 있다. 랙이라든가 , 지터 등의 단어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게이머일 가능성이 99.8%이다. 나머지 0.2% 통신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친다.


0.1초의 랙이 생과 사를 가른다. 게임을 하는 것이 야구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헛소리 말라. 게임을 하는 것은 단순히 관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운드 위에 올라가는 것이다. 차이는 내가 게임을 한다고 해서 누가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일 뿐…


아쉽게도 번들이나 저가 공유기는 0.1초의 랙의 희생양이다. 다른 게이머와 동시에 마주쳐 ‘fire’ 버튼을 눌러있는데 내가 누워있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공유기를 바꿔보라. 누워 있는 것은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인터넷 속도는 내가 더 빠르게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 기본 속도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니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공유기이다. 같은 1 Gbps의 인터넷을 쓰더라도, 누구 집에선 200 Mbps도 나오지 않고 누구 집에선 700 Mbps를 상회하는 평균값을 만들어낸다.


공유기에도 하이엔드가 존재한다.


Asus, Netgear, Linksys, TP-link 등이 그들이다(저가형 공유기도 만들지만, 지금부터 언급하는 건 고사양 공유기를 전제한다).


게이머들이 가장 선호하며 일반적으로 전문가 그룹으로부터 높게 평가받는 브랜드는 Asus이다. 특히 로그 시리즈는 아서스 패밀리룩을 완성시키는 끝판왕이다. 외견만 봐도 모니터와 PC 등과 함께 당장 우주로 뛰쳐나갈 것만 같은 포스와 빛을 발휘하는데, 가격이 깡패라 검색했다간 귀싸대기 맞는 기분이 들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넷기어와 링크시스이다.

아서스가 공유기계의 포르셰라면, 넷기어는 벤츠나 BMW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밤에 아내 몰래 게임할 때마다 나에게 기쁨의 승전보를 안겨줄 것 같은 이름하여, ‘NightHawk’ 시리즈가 유명한데 그 자태는 마치 미국이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는 초음속 폭격기에나 어울릴 법하다.


링크시스는 사실 큰 존재감이 느껴지던 회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벨킨이 인수를 하면서 가치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애플 공홈에서 유일하게 선보이고 있는 공유기가 링크시스이니 말 다했다. 게이밍 분야에선 다소 평이 떨어지는 경향이 엿보이나, 사무실 등 넓은 공간에서 라우터와 노드를 연결해 쓰는 확장형 메시공유기계에선 여포급 전투력을 발하고 있는 회사이다.


행여나 마지막에 소개했다고 해서 아서스나 넷기어의 하위 호환 정도로 치부하지 말길 권고한다. 링크시스 공유기만 해도 가격을 검색해본다면, 집 나간 아들놈이 “아버지, 링크시스 공유깁니다.” 라고 말할 경우 두 말 없이 바로 문 열어줘야 할 테니.



2.


몇 달 전부터 내 신경을 긁는 것이 있다.


‘Linksys Velop’이라는 와이파이 이름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뜨는 와이파이 이름 중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저 와이파이 이름은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의 TP-link 아쳐 공유기는 떨고 있었다.


체감속도는 물론 인터넷 속도 측정을 할 때마다 고객센터에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공유기 자체의 성능이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AC급 wifi5 계에선 충분히 아름다운 녀석이다. 단순히 해가 지날수록 ioT 기반의 사물들이 집안을 채우면서 과부하가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링크시스 벨롭 공유기는 와이파이 이름만으로 세부 스펙은 알기 어려우나 아마도 wifi6 AX급 공유기라 믿고 있다.


일반적으로 와이파이 이름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와이파이 이름의 예.


1) OllehwifiADA6, SK_WiFi1C1D

: 이건 100% 어르신들이다. 쉽게 말해 우리 엄마 집에 가서 “엄마 와이파이 이름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어머니는 이렇게 답하신다. “KT 뭐 있어” 찾으려고 하면 비슷한 이름이 한 두세 개쯤 보이기 때문에 결국 공유기의 아랫부분을 들쳐보고 모델명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버지만 해도 공유기와 셋톱박스의 차이를 모르시던데, 언감생심 와이파이 이름을 바꾸다니?


2) kim000, jek0202, macky2

:  식별하기 쉽게 바꿔놓는 와이파이 이름이다. 간혹 예능감 넘치는 와이파이 이름을 기대하고 살펴보는 일도 있으나, 사실 대부분은 본인의 별명이나 애칭, 때론 본명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iptime

: 이건 그냥 iptime이다. 많이들 쓰다 보니 공유기 대신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주로 사무실 같은 데 이런 와이파이가 많다는 걸 깨달았는데, 본인이 iptime에 한 번이라도 접속하고 나서 아이폰을 들고 활보하다 보면 온갖 iptime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가련한 녀석을 발견할 수 있다.


4) ‘610호 층간소음 제발’, ‘Godblessyou’

: 메시지를 담는 경우이다. 공개적 망신주기부터, 따스한 한 마디 등 소통 시도형.


이렇게 4가지가 와이파이 이름의 카테고리이다.


그렇다면 ‘Linksys Velop’이란 대체 무슨 상황인가?


장시간의 천착을 필요로 했다. 따지고 보면 3) iptime과 같은 상황이라고 상정할 수 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든다.

답은 여기에 있었다. “포니와 각그랜져는 다르다”


그렇다, 분명 아랫집인지 윗집인지, 옆집인지 그는 자신의 공유기를 뽐내려던 것이다.

와이파이 이름을 남들이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테니 자랑삼아 이렇게 천명하곤 도발한 것이다.


“링크시스 벨롭이다! 이 x벨롬들아!”



3.


인터넷 속도 문제로 기사님이 방문하신 적이 있다. 속도가 프라임타임인 저녁 시간대에 너무 안 나온다고 하자, 그분은 “어? 공유기가 저희가 제공해드린 게 아니네요? 아무래도 공유기 문제인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가 나에게 공유기에 대한 원론부터 각론 강의를 듣게 됐다. 그분은 이후 또 소환될까 봐 걱정됐는지, 본사와 비밀리에 무슨 통화를 하더니 원랜 안 되는데 뭐가 어쩌고 저쩌고 외계어를 쏟아놓으며 조치가 다 됐다고 하시곤 황급히 일어나셨다.


그토록 우리 동에서 공유기만큼은 내가 가장 앞서있다고 믿고 있던 나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다니 질 수는 없었다.


일단 TP-link는 처분했다. 여전히 성능을 뽐낼 수준은 됐는지, 날름 5분 만에 어떤 40대 남성이 사갔다. 그분은 내게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쓰기 좋냐고 물었는데, 이걸 보아 이분은 어지간히 진지한 게이머였을 것이다. 부디 킬 수가 그대와 함께 하길… 나는 공유기를 받아 들곤 총알처럼 차에 시동을 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공유기에 진심인 사람에겐 메인 라우터 따위 하나 없어도 보조용 노드로 쓰던 공유기 정도는 한두 개쯤 있는 법이다. 내 경우는 애플 타임캡슐이 있기에 일단 새로운 공유기를 찾을 때까진 버틸 수 있었다.


ASUS와 Netgear는 처음부터 목록에서 삭제했다. 오로지 링크시스만 판다. 링크시스 벨롭으로 시비를 걸었으니 링크시스로 눌러준다는 게 기본 방침이다. 또한 그가 ASUS, Netgear를 모를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 사살을 해야만 한다.


그의 링크시스 벨롭은 분명 wifi6이므로 그보다 상세 스펙이 필요했다.


2021년부터 새롭게 등장한 신기술은 와이파이 6E이다.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한 사족을 덧붙이자면,


1) AC - wifi5급으로 현행 대부분의 공유기 스펙

2) AX - wifi6급으로 현행 고스펙의 공유기들. 최대 속도와 커버리지에 따라 수십만 원에 이르기도 한다.

3) AXE - wifi6E급으로 현재 나온 최고의 기술. wifi6에 비해 채널 폭이 넓어 전파 방해 없이 안정적인 속도를 제공하는 아우토반 같은 기술이다.


이거다, AXE급이다.


문제는 아직 국내에서 전파인증이 안 돼 모델이 출시되지 않았다…


좋다, 그럼 직구한다.


링크시스 라우터 중에 현존 최상위 스펙 ‘Linksys Hydra Pro 6E’.


AXE급인 데다 이름이 히드라다. 이거 이기려면 이제 헤라클레스 이딴 거 나와야 한다.


Velop이 어디서 따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벨로시렙터 건 벨로시티건 ‘빠르다’는 의미의 접미사를 차용한 것이라면 됐고 그냥 히드라 앞에서 묵념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격 따위 중요치 않다. 그냥 결제 클릭 한방에 오면 좋았겠지만, 배송대행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 섬세함은 유지해야만 했다.


며칠 뒤, 히드라가 도착했다.




이제 응징의 시간이다. 와이파이 이름을 쓴다. 풀네임이 다 안보이더라도 확실하게 써야 한다. 6.6 Gbps는 빠뜨리면 안 된다.


‘Linksys Hydra Pro 6E 6.6Gbps’



4.


아내가 집에 오더니 와이파이 이름은 대체 왜 이런 것이며, 저 시커먼 공유기는 또 뭐냐고 묻는다.


“이건 공유기 전쟁이야. 지면 끝장이라고.”


그러면서 왜 와이파이 6E가 왜 좋은지, Tri-band이지만 와이파이가 3개인 게 아니라 알아서 최적화된 채널로 연결시켜주는 기능이며, 최대 70개 넘는 기기들을 연결할 수 있다며 피를 토해가며 열변했다. 이제 안방 화장실에서 와이파이가 끊기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야…


아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유튜브와 구글로 뭔가를 검색하는 듯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인터넷 속도 측정을 해보는데 기존에 비해 10% 정도 속도가 올라간 것 같다. 500 Mbps 나오던 게 한 550 Mbps 나오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전쟁에서 실리 따위야… 벨롭 녀석이 대체 히드라가 뭐냐며 무릎을 꿇으면 족하는 거다.


거실에서 아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이거 인터넷 기본 속도가 2.5기가 이상이라야 효과를 본다는데, 우리 집 1기가 아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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