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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13. 2022

극부부도 #8. 전단지와 올드보이

함부로 동정하지 마

1.


내가 처음 전단지를 돌려본 것은 92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전단지 1000장을 돌릴 때마다 5만 원을 주겠다고 해 인근 아파트를 돌며 3000장을 돌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해라 경기를 봐야 하는데, 돈을 벌겠다고 몇몇 경기를 빼먹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전단지를 돌렸단 사실을 까먹지 않았다.


학원에선 길거리에서 나눠주면 된다고 했다. 우리 나이 또래의 아이가 있을 법한 엄마들, 아줌마들한테 주면 된다고 했다. 근데 그렇게 해선 며칠을 돌려도 3000장을 돌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리고 왠지 창피했다. 머리를 써야 했다.


하루만 투자하면 될 일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1000가구, 길 건너 대규모 아파트가 2000가구. 아파트 두 단지만 돌면 3000가구, 15만 원. 생각해낸 답은 우편함이었다. 혼자 해도 될 일이지만, 둘이 하면 덜 심심할 것 같아 친구를 꼬셨다.


우리 아파트는 당시 반포-서초 바닥에서 가장 가난한 아파트로 통했는데, 그래서였을까 보안이 허술했다. 초등학생 둘이 1층의 우편함에 전단지를 욱여넣는 모습을 보면서도 경비아저씨들은 물끄러미 쳐다만 보셨다. 내가 살던 동의 나이가 지긋하신 경비아저씨만 궁금했는지 사정을 묻고선 “아이고, 학원에서 용돈 받아오면 이 할아비 콜라라도 하나 사주려무나! 더운데, 어여어여”라고 말했을 뿐.


우편함에 전단지를 넣는 손놀림은 빨라졌지만, 문제는 2000가구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터졌다. 동네에서 가장 부자 아파트라 소문난 그곳… 부잣집 애들이라 그런지 호주머니에서 쉽게 지폐를 꺼내던 그 아파트로 나 역시 드래곤볼 카드를 팔아 짭짤하게 용돈을 벌었던 그 동네다.


명성 때문이었을까, 역시나 꼬질꼬질한 ‘외지’ 초등학생에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경비아저씨들의 유니폼도 더 각이 잡힌 듯했고, ‘슬리퍼’가 아닌 광을 낸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다. 번쩍이는 황금색 테슬이 장식된 모자 아래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리고 일단 할아버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우체통은 우체부 아저씨와 관리사무소의 직인이 찍힌 전단지만 넣을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학원 전단지 하나만 넣을게요”


25개 동, 대략 70개의 경비실을 통과해야 했던 그 아파트에서 훗날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배워간 표정을 하며 읍소하는 초등학생에게 우편함을 허락한 이는 10명도 안 됐다. 사실 관리사무소에 가서 허락을 구하면 될 일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고, 쫄보는 몸으로 때운다고… 그날 난, 이 아파트의 위세 앞에 절어버린 탓에 복도식 아파트 15층까지 뛰어다니며 집집마다 문 사이에 전단지를 꽂아두는 편을 택하고 말았다. 오밤중까지 탈진할 정도로 뛰어다니며 땀을 흘린 뒤, 세븐일레븐의 ‘걸프’를 연신 리필하고 나서야 15만 원을 벌었단 생각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어른들이 돼갖고 초등학생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녀야 하는 사지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라 하셨거늘…



2.


아내는 춥다며 내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아이들은 배드민턴장으로 먼저 출발했고, 우린 음료를 사서 쫓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교대역 4번 출구 안쪽의 골목을 지날 무렵, 누군가가 우리 쪽을 향해 움직이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한다.


분명 전단지 아줌마다.


“젊은 부부, 이거 받아봐. 잠깐만 왔다 가. 이거 크리넥스도 줘. 5분이면 돼.”


전단지를 건네받았다간 크리넥스까지 내 손에 쥐어줄 것이고, 이걸 건네받으면 멱살 잡혀 끌려가듯 오피스텔 홍보전시관에 끌려가는 거다.

 

“아이, 죄송해요. 지금 좀 급해서요.”


아내가 웃으며 거절하고 지나치려 하자, 이번엔 팔로 앞길을 막아섰다.


“아이 젊은 부부, 잠깐 5분이면 돼. 이거 받아줘. 나도 이거만 건네면 이제 점심 좀 먹으려고 그래. 한번 사정 좀 봐줘.”

“죄송해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아니, 그러지 말고”


그분은 급기야 아내의 옷깃을 잡아끌며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고, 아내가 뒤돌아서서 단호하게 손대지 말아 달라고 정색하자, 그제야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칼로 무를 자르는 것처럼 1분여 동안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하수였다.


전단지의 고수는 사람의 앞길을 막지 않는다. 그들은 살짝 동선에서 빗겨 나있지만, 지근거리에 머문다.  ‘타짜’의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체득하는 경지로써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경계심을 풀게 한다. 다만, ‘헉’ 하는 순간 전단지는 고수의 손을 떠나 행인의 손으로 건네 쥐어져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 나처럼 몸이 고달파질 수는 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을 타깃 삼아 오피스텔 분양 전단지를 돌리는 거라면 차라리 집집마다 꽂아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관심 있는 이라면 전단지만 봐도 제 발로 찾아갈 것을… 크리넥스 값도 아끼고 말이지.


생면부지의 남이라도 거절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전단지를 돌려봤지만, 거절했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3.

(올드보이 원작 만화 및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1월 7일은 ‘올드보이’의 원작 저자의 기일이었다.


카리부 마레이. 작품마다 다른 필명으로 활동하던 일본 작가이며, 올드보이 원작 만화에선 ‘츠지야 가론’이라는 필명으로 임했다.

영화 ‘올드보이’에는 ‘츠지야 가롱’으로 표기돼 있다. 작화는 따로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영화가 명작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두 배우의 열연,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는 명대사들, 화면을 채우는 미장센과 흐르는 듯한 촬영기법.


다만, 원작을 뛰어넘는다고 말하는 데에는 불편함을 느낀다.

원작과의 비교우위를 논하기에 앞서 주제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상 영화에서 보여주는 복수의 이유가 직관적이다. 혀를 잘못 놀린 탓이라니. 너 때문에 누나와 나의 근친이 들통났고 이에 누나가 죽었어. 너 때문이야. 직관의 다른 의미론 ‘쉽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주제의식 자체를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에 방점을 찍었다고 보자면, 복수의 이유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들로 채워도 불만은 없다.


원작 만화에선 왜였을까.


말도 없고 음침한 데다 못생겼기에 은따 비슷한 녀석. 하지만 학업성적만큼은 톱클래스라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녀석인데, 음악 실기에선 형편없는 음치였다. 음악 시간에 그가 ‘꽃마을이란 동요를 부르자 급우들은 드디어 조롱할  있는 기회를 포착했고 조소하길 마다 않는다. 그런데 유독  명만이 그에게 다가간 , 눈물을  방울 흘린다. 그러다 “어라, 내가  이러지라고 말하며 급하게 눈물을 훔쳐낸다.


이게 복수의 이유다.


거부당하는 데 익숙하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모든 주변인을 괄시하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을 하나하나 물질적인 성공이라는 미명 아래 짓밟아주면 그뿐이었고, 단지 그것을 원동력 삼아 살면 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에서 가장 인기 많지만, 그의 잣대로는 자신의 고통 따위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위선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듯 공감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비정한 세계관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쉽게 말하면 ‘동정당한 것’이 복수의 이유이다.


동정은 단순한 공감의 차원을 넘어선다.


거지를 보며 동정을 느낀다는 것은,

(1) 내가 저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2) 저렇게 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결계,

그리고 (3) 나는 더 우월하다고 생각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상대로 하여금 열등의식을 강요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동정했다고 느끼는 순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끔 하는 장치가 된다는 데서 동정은 터부시되기도 하는데, ‘올드보이’ 원작에서도 유지태 역할인 카키누마는 마지막에 자살하며 ‘너처럼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의 열등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동정은 누군가에게 모욕감이 될 수 있다는 것.


분리수거도 안 되는 필름형 전단지를 받아 들고 집에 들어와 쓰레기통으로 쑤셔 넣을 때마다 매번 받아줘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면, 전단지를 돌려본 소년이 성인이 돼 해보는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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