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한 글씨, 여백 없이 꽉 채운 모습
초등학교 일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어릴 때 말을 잘 들었다.
시키는 걸 잘하고, 혹은 1등으로 하면
선생님께서는 착한 표 포토 알 스티커를 주셨고
그걸 다 채워오면 엄마에게 칭찬을 받았다.
뭐든 잘하고 뭐든 칭찬받고 싶은 아이였다.
본격적으로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엄마가 보이지 않고 할머니가 와 계셨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이혼절차에 대해 나는 설명을 들은 바가 없다.
(지금 와서 보니, 엄마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에 혼란의 단계가 한동안 지속된 듯하다.)
상황의 종료점이 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뭔가를 물으면 안 될 거 같은 분위기로 그렇게.
얼마 전, 금쪽 상담소에 송선미 씨가 나왔다.
남편분께서는 2017년 할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친척과 갈등을 빚던 중 사촌동생의 살인 교사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보낸 후 7살 딸의 고민을 털어놨다.
오은영 박사님께서는
딸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그리움인데,
"그리움은 같이 그리워하는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조언하고,
그리움을 나누려면 서로 많은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이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family secret', 즉 '가족 내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오은영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비밀을 나중에 알게 되면 아이가 다양한 감정을 털어놓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뭔가 꺼려지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궁금한 얘기들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마음속에 혼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아이의 나이에 맞는 선에서 얘기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엄마가 없다는 걸 마치 내 얘기가 아니라고 회피했다.
그런데 먼가 숨기고 싶기도 했다.
나에 대해 관심을 주는 존재가 없어졌다.
고모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네가 못 나가게 말렸어야지. 어디 가냐고 물어봤어야지."
진짜 내가 그랬어야 하나?
나는 잘 몰랐던 거 같은데..
그러면서 내 글씨는 반듯할 필요성을 잃어갔다.
내 안에 한계를 쌓아나갔다.
내가 조금 다른 아이들과 다르구나.
이제 막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
굳이 손가락에 힘을 주고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집에서의 관심이 떨어지니
학교에서의 선생님의 관심도가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흘려 쓰게 되는 글씨체.
무조건 잘해서
무조건 칭찬받아야지!라는 게 강했던 나.
이 아이의 부작용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급격히 능력을 발현시키지 않는다는 거였다.
학교생활은 그냥 그랬다.
댄스동아리를 하고,
염색도 슬쩍해보고.
에쵸티를 미친 듯이 좋아하고,
수업시간에 잘 수 있으면 자는 그런 애.
그냥 그랬다고 표현하는 것은
춤 연습을 같이 하다가도 엄마 때문에 공부하러 가야 해
라던지,
나도 공연 가고 싶은데 주말에 학원 안 가면 엄마한테 혼나. 라던지
그런 이유를 대지 못했다는 것.
별로였다.
어쩌면 지나친 자유로움이 씁쓸했다고 할까.
그래서 학교생활의 기억은
친구들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성적이 이렇게 까지 떨어질 수 있구나.
기분이 꽤 별로였지만
어릴 때처럼 승부수를 띄우며
노력하지 않었다.
아빠에게는 그냥 별 탈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적당히 적당히.
세상의 배경으로 사는 걸 자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