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낯선 사람[1]
<익숙한 딸에게서 발견한 낯선 여자>
내 기억 속의 딸아이는 늘 물음표를 달고 사는 아이였다.
"엄마, 나 뭐 입지?", "엄마, 나 이거 해도 돼?" 사소한 결정 하나 혼자 내리지 못해 늘 나만 쳐다보던 아이였다.
남들은 대통령이다, 의사다, 선생님이다 장래희망을 떵떵거리며 이야기할 때, 꿈이 뭐냐는 질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내속을 까맣게 태우던 아이.
나는 딸아이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늘 걱정이 앞섰다.
나는 그 '꿈'이라는 맹랑한 녀석을 찾아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플루트, 수영, 피아노, 난타, 미술... 이것저것 가르쳐도 봤다.
하지만 꿈은 부모가 억지로 떠먹여 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일찌감치 목표를 정해 앞만 보고 달리는 딸의 친구들을 볼 때면,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딸아이가 안쓰럽고 조바심이 났다.
'도대체 왜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걸까? 엄마인 내가 스스로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 걸까? 혹시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건 아닐까.'
밤마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솔직한 내 마음을 꺼내 보이기로 했다.
"공부 좀 못해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 나에게도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가슴 한구석에 멍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만큼은 그 아쉬움을 모르고 살기를, 성적표의 숫자보다는 가슴 뛰는 일을 좇으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기도였다.
그렇게 딸아이는 스무 살이라는 고개를 넘었다.
성인이 된 딸아이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딸아이는 더 이상 내게 길을 묻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그 결과까지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가져간다.
가끔은 예전 버릇처럼 "이런 방법은 어때?"하고 조언을 건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엄마,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그 단호한 마침표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딸아이가 대견하면서도, 밀려드는 서운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내 눈에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데, 어느새 녀석은 통제가 닿지 않는 곳으로, 나의 관할 밖으로 훌쩍 넘어가 버린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이제 앞에서 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뿐임을.
나는 이 낯선 거리감을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지 © AI 생성 (비새의 콘셉트 기반)
최근 딸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언젠가 딸아이가 "엄마, 엄마는 눈치가 빨라?"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인데, 난 딸아이에 속뜻도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빠르지"라고 답했다.
딸아이는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걸 내가 눈치챘는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딸아이는 스무 살이 되도록 남자를 한 번도 사귀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모태솔로라고 놀리곤 했다.
그런 딸아이에게 갑자기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많이 놀랐다.
어릴 적 딸아이는 내게 호언장담하곤 했었다.
"엄마, 난 고등학생돼도 교복 짧게 줄여 입거나 화장 진하게 하는 애들처럼은 절대 안 할 거야."
그때 그 맹세는 무색하게도, 요즘 딸은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다.
물론 치마는 여전히 얌전하게 입지만, 화장은 과하게 하지는 않아도 화장으로 드러나는 예쁨을 좋아한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며 한껏 꾸민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알던 그 털털하던 딸아이가 맞나?' 화장대 앞에 앉은 저 낯선 여자가 내 딸이라니...
"엄마, 나 예뻐?" 낯선 여자가 묻는다.
"어, 예쁘네. 예뻐" 그 장면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 , 괜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던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말에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 반, 철렁 내려앉는 걱정 반이다.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혹여나 상처받지는 않을까, 너무 깊이 빠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다 큰 딸아이에게 "연애하지 마"라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쿨한 척 손을 흔들지만 속으로는 오만가지 걱정을 삼킨다.
꿈이 없다며 울상 짓던 꼬마는 이제 없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화장을 하고,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딸아이를 보며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가르쳐주려 했던 수많은 길보다, 딸아이는 스스로 더듬어 찾은 지금의 길을 더 즐겁게 걷고 있다.
조금 서운하면 어떤가.
엄마의 품을 떠나 낯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씩씩해서 다행이다.
나는 오늘도 현관문이 닫힌 뒤에야 '익숙한 낯선 여자'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
시리즈 대표 이미지 © AI 생성 (비새의 콘셉트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