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맛있는 커피 한잔을 마셨다

열흘 만에 마신 인스턴트커피, 이렇게도 맛있을 줄이야

by 레지널드

며칠 전까지 복통을 심하게 앓았다.

병원진료도 받았는데 진료 말미에

답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피는 마시면 안 되겠죠?"라는 질문을 했다.


의사 역시

'이 사람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하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이윽고 다시 친절하게

"네,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장에 안 좋습니다"

하고 답변해 주었다.


나오면서 '디카페인은 괜찮나'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지만 당시의 나는

아프긴 아팠기에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을 땐

뜨거운 물에 수제 매실청을 타서 마셨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완전히 다 나았다고 판단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더 커피를 참았다.


남들은 커피를 끊으면

정신이 말끔해진다는데 나는 반대였다.

멍해질 때가 있었고 커피 한잔만 마시면

금방이라도 총명이 가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드디어 열흘째가 되었다.

이제는 마셔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믹스커피를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블랙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오전 근무만 있던 날이라 집에 오니

아직도 봄볕은 따사로웠다.


커피가루를 컵에 담는 순간,

'우리 집에서 얼마 만에 나는 커피 향인가'

하고 감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랬다.

전기 포트에서 팔팔 끓는 물을

컵에 붓는 순간 아까의 향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진한 향이 주방과 거실에 퍼졌다.


유명한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

최고급 원두로 만든 커피는 당연히 아니지만

이 커피는 나에게 그것들 이상의

진한 향과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

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

아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많이 남은 나의 개인시간,

그리고 커피까지..


이왕 폼 잡는 거 더 확실하게 잡아보자는

심산으로 내 휴대폰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재즈풍의 음악들을 재생시켰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과장이 아니라

온 핏줄에 커피가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가 이렇게도 맛있는 음료였다니'라는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내 몸이

심각한 카페인 중독인가라는

걱정도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커피를 음미했다.


살면서 잊지 못하는 커피에 대한 추억이 있다.


처음으로 믹스커피를 마셨던 때,

성인이 되어 처음 간

스타벅스에서 마신 카라멜 마키아토,

논산훈련소 수료 후 마신 캔커피,

이탈리아에서 처음 마셔본 에스프레소,

그리고 며칠 전 마신 인스턴트커피

앞으로 몇 년간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겪은 일련의 소동들로 인해

나의 커피 취향이 좀 바뀔 것 같다.


우선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습관을 버릴 생각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여름에만 마시고

그 외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이다.

이번 복통 사태를 촉발시킨

그린티 라테는 큰 전환점이 있지 않은 이상은

절대 마시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나 좋아했던 믹스커피를

대폭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예 끊을 순 없다. 끊을 생각도 없다.

대신 쉬는 날에만 마실 것이다.

믹스커피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비판적인 기사를 그동안은 다 거르고 살았는데

이번엔 경우가 좀 다르다. 건강을 생각해서 줄여야겠다.

지금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다 마시면

귀찮아서 멀리했던 캡슐커피를 주로 마셔봐야겠다.

corinaselberg-redcurrants-179119_1920.jpg 출처: 픽사 베이

아주 천천히 커피를 다 마시고

글을 쓰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원래 그날처럼 오전 근무만 하는 날에는

오후에 반드시 낮잠을 잤었다.


정신이 너무 멀쩡했다.

뭐 덕분에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해서

좋긴 했으나 이 카페인의 위력이 웃기면서도 놀라웠다.

나는 밤 9시에 커피를 마셔도

10시에 잠드는 사람이었는데

오랜만에 커피 한잔 마셨다고 졸음이 싹 가신다니..


커피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칼디의 전설에 등장하는

염소가(커피 열매를 먹고 힘이 뻗쳐 흥분)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저녁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낮에만 마신다.

이번 주말, 한번 시도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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