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그랑! “
대리점 사장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나라상사입니다.”
가게 안쪽 방에 누워 깜박 잠든 나는 꿈결인지 헤맨다. 여기가 어딘지 잠시 정신이 나가버리고 허둥대며 일단 “네”하고 대답부터 해댄다.
아픈 허리 탓에 옆으로 뒹굴어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비몽사몽이다. 허리 아프다는 이유로 늘 누워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참 부끄럽다.
허리 디스크는 누운 상태가 제일 편하다. 이런 이유로 누워있는 편안함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욱신거리는 통증도 누워있는 것만으로 덜한 것은 분명하다. 이러다 보니 벌써 수개월째 합법적으로 게을러지고 있다. 근데 문득 ‘부끄럽다’에 이르렀다.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퇴근 후 수영장에서 수영하면서, 주방에서 설거지하면서도 가게에서의 부끄러웠던 심연에 깊이 빠져 있었다. 미지근한 물에 빠진 개구리가 서서히 오르는 온도를 인지 못 해 죽었다는 우화처럼, 나는 아픈 허리를 이유로 서서히 게을러지다 마침내 부끄러움에 도착했다. 나에게 몹시 부끄러웠다. 물론 여전히 허리는 아프다. 그래도 그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다가왔다는 것은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함이다.
성경에도 죄지은 자에 대한 징벌의 하나로 수치를 당하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부끄러움과 수치는 닮은 듯 다르다.
수치는 치욕, 굴욕과 같은 아주 강렬한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이다.
부끄러움은 창피, 쑥스러움, 어색함 등 긍정적인 맥락에서의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쌓이면 수치를 잉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답들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수치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했던 윤동주 시인이 지향한 순결한 삶의 의지와 고뇌는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일 것이다.
자신에게 부끄럼이 없이 산다는 것은 먼저 부끄러움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습관도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고 너무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존감 낮은 자세를 취하는 건 아니다. 늘 나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적절함’이 참 좋다. 자신과의 감정도 타인과의 관계도 적절함을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정말 잘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제법 찬 바람이 분다. 쌀쌀하다. 을씨년스럽게 춥다.
산은 서서히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는다. 참으로 가을에 딱 맞는 나무의 적절한 색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단풍이 드는 이유가 기온이 떨어짐으로 광합성을 멈추고 엽록소가 분해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녹색에 가려져 있던 다른 색소인 다양한 색이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나무는 있는 힘껏 엽록소를 차단하여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무의 수고로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풍 명소로 가을 여행을 떠난다.
곧 차갑고 매서운 겨울이 올 것이다. 마지막 잎새마저 떨구고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의 부끄러움은 고귀한 생명을 잉태하기 위함이다. 초라하게 선 겨울나무는 따스한 봄이 오면 꼬물꼬물 싹을 틔워 증명한다.
부끄러움이 아니라고.
의미 있는 하루를 살라며 일상의 부끄러움이 겨울나무에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