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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an 27. 2023

나는 왜 화가 나는가

# 이유에 대한 고찰


신랑은 다정다감하고 그나마 보통의 남자에 비해 중간 이상의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단, 모든 이에게 열린 마음으로 발휘되던 그 능력은 어느새 조리개가 생겼는지 외부에서만 열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집에서는 자주 작동하지 않는 오류가 생겼다.  


대체로 신랑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친절하지만 희한하게 실컷 베풀고도 본전을 못 찾는 스타일이었다. 평소에 실컷 잘해주다가 말 한마디로 점수를 다 잃는다거나 결국 해줄 거면서 투덜거림으로 그 감흥을 반감시킨다든가. 그저 마음 편하게 해 주기에는 내 마음이 내키지 않음을 투덜거림으로 나타내면서 온몸을 써 잘해줬음에도 받는 이들은 감사함을 못 느끼고, 해준 이도 노력만큼 보답을 느끼지 못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그 끝에 늘 서운해하는 신랑이 있었다.


명절날 딸아이에게 신랑과 이모부와 외삼촌. 셋을 두고 미래의 신랑감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으냐 물었더니 오랜 고민 끝에 외삼촌을 택했다. 이는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기보다 아닌 사람을 제외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모부는 부족한 공감능력과 개인주의적 성향, 육아 불참 등 다양한 사유로 일찍이 제외되었고, 혈육인 아빠는 내가 옆에서 무수한 장점을 나열하였음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여 제외되었다. 그렇게 어부지리로 승자가 된 것이 외삼촌이었다.


웃자고 한 게임이었지만, 상처를 받는 건 혈육인 아비뿐인 잔인한 게임이 되었고 아비는 끝내 웃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신랑은 진심으로 상처를 받은 듯했다.


그런 치명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굴욕과 패배감을 잊고 그 이후로도 신랑의 모임 참석과 음주는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마트에 볼 일이 없으면 아빠가 왔는지, 또는 왜 늦는지 묻지도 않는 나날이고, 나 역시 신랑이 늦는다고 하여 크게 불편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카톡을 받으면 화가 불끈 솟는다. 신랑의 잦은 술모임에는 무뎌짐도 없이 매번 이렇게 발끈하는 모양새가 반복되니 나도 이제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술을 마시는 것은 신랑인데, 지극히 그의 일인데, 나는 왜 화가 나는 것일까?


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지나친 감정이입 때문이라 했다. 나의 것과 아이의 것을 분리하여 생각지 못하고 아이의 부족한 것에 심하게 감정 이입한 나머지 나까지 괴로운 심리라 했다. 알면서도 그게 되지 않아 나는 아이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때 아이보다 더 괴로워하며 닦달하게 된다. 비슷한 심리일까? 하나의 객체일 뿐인 신랑을 나에게서 분리하지 못하고 음주로 인해 생겨날 후속작용들을 지레 두려워하느라 나는 이다지도 괴로운 걸까?


1. 나는 우선 신랑이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랑은 그저 좋은 사람이라 소속된 모임도 많고, 개근상이라도 노리는지 모든 모임에 빠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사람이다. 모임을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멤버이지만, 가족 된 자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줄 모르는 우유부단한 가장일 뿐이다. 소수의 모임도 선별하여 참석하는 나는 어느 일보다 모임 참석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2. 그리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싫다. 신랑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지나친 회귀 본능으로 만취하더라도 집은 잘 찾아오던 신랑은 집 앞 계단에서 잠든 적도 있고, 대리기사가 내려놓고 간 종착지에서 차량 시동을 켠 채 잠들어 있기도 했던 것이. 결정적인 순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나의 촉에 의한 것이었는데 촉이란 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감각이라 그것이 발동되지 않고 내가 깜빡 잠들어버릴 경우가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무사귀환 할 때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이 말은 곧 평온한 금요일밤을 보내고픈 나의 마음에 긴장감을 주는 무언가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3. 내가 분명 잦은 모임은 싫으며, 그중 반드시 필요한 모임만 참석하길 바란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이런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힘들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내가 잘못한 것도 모두 자신의 죄로 덮어쓰던 시절이 있었고, 내가 한 번 스치듯 한 말임에도 나의 말이 힘을 가지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젠 백 번을 귀에 대고 외쳐도 메아리 없는 쓸쓸한 외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나는 애달프다. 


4. 그리고 고요한 방식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곤 하는 나는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신랑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말로 쏟아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져 나오는 말들을 술로 틀어막으며 스트레스를 원천차단하는 방식은 고요히 마음을 정돈하는 나의 것과 아주 다른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5. 무엇보다 그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더없이 관대하다. 이렇게 말하던 내가 막상 술자리 당사자가 된다면 그날의 처지, 상황, 분위기는 무조건 마실 수밖에 없는 완벽조건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신랑은 내가 아니기에 나는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론 이해하지 않는다. 내가 당사자인 그때는 맞고 신랑이 당사자인 지금은 틀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가장 잘 알 것 같은 우리는 오히려 가장 낯선 타인일지도 모른다.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봐 온 나는 신랑을 가장 잘 안다고 자신하지만 그것은 그가 보여준 모습, 또는 내게 부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것을 신랑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역시나 절로 알아주길 원하는 것이 있고, 좀체 몰랐으면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완벽히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내가 나열한 이유들에서 나는 나와 다른 방식의 신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괴로운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나의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저 그 사람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나의 영역으로 억지로 끌어다 놓고 왜 나와 비슷하지 않냐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 카카오스토리가 유행하던 시절 내가 신랑의 이미지를 애처가에 다정한 아비로 너무 포장하는 바람에 신랑은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실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브런치를 언젠가 접하게 된다면 이젠 오히려 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며 항변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카톡 하나로 오늘의 글감 하나 투척하고 불금을 즐기는 신랑을 오늘은 조금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려봐야겠다. 그가 만드는 그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지만 다음 모임 카톡에 나는 또 부들부들하며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이 적어도 며칠은 벌어주길 바랄 뿐이다.




# 그림 출처 : 대한한의사협회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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