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여자 Feb 15. 2023

우리 가족의 여행법

# 여행의 단상


생일

딸아이의 생일을 맞아 포항을 다녀왔다. 친정부모님과 우리 집, 여동생집은 일 년에 두세 번 비슷한 의미를 부여하며 함께 여행을 한다. 보통의 여행과 다름없이 먹고, 보고, 걷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떠나면 여행에 반들반들 윤이 나는 느낌이다. 흠집이 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애쓰는 동안 우린 익숙함이나 나른한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에 놓이게 된다.


생일은 아이가 태어남을 의미하기 이전 내가 아이를 낳은 날이기도 하다. 10개월 간 같은 몸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각자 다른 불안에 휩싸이던 날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끊임없이 안도감을 주길 바라며 속싸개 사이로 손을 빼내고 불안을 호소할 때 엄마는 더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함에 불안을 느끼던 날이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아이를 마주하고 처음 대면한 감정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아이라는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 저 조그마한 생명체의 안위가 온통 내 손에 달렸다는 막막함. 그런 마음마저 죄가 될 것 같아 미처 내색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앓았다. 물컹하고 비릿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이는 나의 섣부른 단정을 비웃듯 버겁거나 막연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내가 모성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는 동안 아이는 그 마음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번 축하를 하며 저를 낳고 마냥 기뻐하지 못했던 나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본다.


화자

우리 차에는 엄마가 같이 탔는데 엄마는 운전하는 사위가 졸릴까 계속 말을 건다. 오래간만에 만난 나에게도 계속 말을 한다. 나는 대답을 하다가 말다가 한다. 꼭 필요한 말에는 대답을 하고 그냥 흘리는 말엔 침묵한다.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때론 대답이 필요치 않은 말이어서, 또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여러 번 침묵한다. 나는 불친절한 화자다.


오래된 거리에 차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느낌은 비었던 트렁크를 채울 때와 낯선 도로에 멈춰 있을 때 문득문득 들곤 한다. 비워져 있던 것이 채워진 듯한 기분 또는 낯선 곳에서 뜻 모를 환대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길에 정체되어 있는 시간이 좋다.


도로변에서는 커다란 크레인을 세워놓고 전정작업이 한창이다. 좁은 도로를 의식한 듯 작업 속도는 빠르고 능숙하다. 둥치가 큰 나뭇가지가 금세 잘려 나온다. 길게 뻗어있던 가지들을 다 쳐내고 나니 가려져 있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제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간판들. 어떤 것은 너무 친절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고 있고, 어떤 것은 적힌 문구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어 조금 불편하다. 역시나 불친절한 화자. 그래도 저 이름은 오랜 고민 끝에 나왔을 거라며, 쉽게 나온 문구는 아님을 간판을 대신해 변명해 본다.


바다

겨울바다에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냉정하게 재단하듯 밀려온 만큼 밀려나갔다. 내뱉으려는 내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끝내 들으려던 생각이 없었단 듯이 다른 파도가 밀려와 덮기 바빴다. 파도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겨울 바다 앞에 서서 나는 삼키는 말이 더 많아졌다. 내처 오는 파도처럼 말을 삼키기만 하는 내 앞에서 더 많은 말을 하지 못했던 엄마가 생각나 돌아가는 차에선 조금 더 호응해 보았다. 엄마는 이전보다 조금 더 들떠 보였다.  


여행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여행은 여러 순간 삐걱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래 같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고 개인행동을 서슴지 않는 아빠는 혼자 앞장서서 구경을 하시고, 엄마와 동생과 나와 어린 조카는 소소한 소품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운전에 지친 사위들은 근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우리 집 청소년들은 때로 걷고 때로 차에서 쉰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꾸짖으며 같이 행동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존중한다. 같이 또는 따로의 여행을 즐긴다. 같은 곳에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담으며 여행을 한다.


그리고 가급적 좋았던 일만 떠올리며 추억한다. 지난번 여행은 이게 좋았고, 그 앞번 여행은 이런 게 좋았다 말한다. 때로 말하는 대로 믿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좋았던 여행이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다소 서운하거나 아쉬웠던 기억은 절로 밀려난다. 가스라이팅 하듯 좋은 기억만 애써 주입하고 다음 여행을 꿈꾼다. 자꾸 매만져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는다.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떠난 여행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나의 죄책감을 충분히 덜 수 있도록.


아이는 촛불을 끄면서 유독 여러 번 웃었다.



;) 포항에 간다는 말에 알찬 정보를 성심껏 제공해 주신 박상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화가 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