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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Feb 21. 2023

이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내게 가장 어려웠던 팀장은 내 의견을 묻고 그것을 전적으로 반영하던 팀장이었다. 외형만 보자면 더없이 민주적이고 직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 같지만 그것은 조금만 뒤집어 보면 그 의견에 대한 책임 또한 전적으로 내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느 해 인사발령으로 새 부서에 가자마자 미루고 있던 윗선 지시사항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시사항이므로 그것은 무조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나 전임자가 미처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사업을 실행하기에는 내재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야 할 일들에 삭선을 그어가며 처리해야 할 일들을 줄여가던 그때. 매일 삭선처리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과제가 있다는 것은 시험이 코 앞인데 미처 공부를 다 하지 못했을 때와 비슷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조급하고 또 불편했다. 그때 나는 경력이 많지 않았던 때이나 심사숙고형 인간이었으므로 당시의 경험치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을 방안을 세워서 결재를 갔고 그에 대한 보완책을 주거나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 바라며 들고 간 결재판에 팀장은 서슴없이 사인을 했다. 어찌해야 될까? 어떻게 하면 좋겠니? 네 생각은 어떠니? 음. 그게 좋은 것 같다. 그럼 그렇게 하자. 다음을 또 생각해 보렴.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보다 끊임없이 나의 의견을 물었다. 답을 해야하는 사람이 내게서 답을 구하고자 했다.


지시사항을 받아 온 것은 자신이지만 이제 그 공은 내게 넘어왔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겪어야 할 시행착오와 그와 함께 껴안아야 할 모든 불안은 내 차지가 된 것이다. 내가 내놓은 계획은 나조차 미심쩍은 것이었는데 팀장까지 생각 없이 선뜻 오케이를 하자 불안이 가중되었다. 그리고 그 팀장은 결단력이나 책임감 대신 흐름을 읽는 눈치가 빨라 큰일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먼저 눈치채고 그 부서를 능력껏 일찍 빠져나갔다. 경력조차 미미한 나를 적극적으로 믿어주던, 오죽했음 그런 나를 믿어야 했던 그 팀장의 결정장애 또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나는 그 시절 매일 불안을 느껴야 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정장애 또는 우유부단함. 그것은 내게 너무도 밀접하고 익숙한 감정이다. 친정집은 다섯의 가족이 있었는데 우유부단형으로 단결되는 아빠와 여동생, 남동생이 있었고, 결단형의 엄마와 내가 있었다. 그들은 결단형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답을 구했다.


아빠는 얼마 전 비뇨의학과 진료 후 레이저 수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어 수술날짜를 잡아둔 참이었다. 수술은 전신마취로 진행되기에 이에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한 몇 가지 검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런 이유로 검사 전날 아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세 개 과의 검사를 모두 취소해 버렸다는 것이다.  


자초지종 설명을 들으니 아빠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유경험자인 동네 어른과 여럿의 친구를 만나본 결과 굳이 수술까지 할 필요가 없고 마침 처방받아 먹고 있는 약이 전에 없던 효과를 보이는 듯하니 약으로 치료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분명 약으로 치료할 단계는 넘어섰다 하였고, 연세가 있으시니 나중엔 수술이 어려울 수도 있고, 방치하는 경우 방광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 해도 아빠는 꽤 단호하셨다. 수술을 하지 않겠다 했다. 그럼 일단 의사를 다시 만나보고 수술여부를 판단하시자 했고 그러는 과정에도 아빠의 불분명한 의사표시로 예약이 꼬여 있는 바람에 자잘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다시 예약을 잡고 의사를 만났더니 약의 효과는 일시적이고, 지금은 절대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수술로 삶의 질이 훨씬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사진과 참고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셨다. 나는 아빠가 궁금해 할 수 있는 부작용, 재발 위험 등을 대신 물어 모든 답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제야 겨우 안심이 되었는지 아빠는 다시 수술을 하시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하루에 끝날 수 있었던 3개 과의 검사는 다시 각각 3일의 날짜로 진료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다시 번복하기까지 아빠는 여럿의 말에 휘둘리며 오랜 시간 갈팡질팡 했다.


이런 일을 처리하며 화가 쌓이고 있던 날 밤. 아이의 어린이집 졸업식에 갈 옷을 고르는데 벌써 며칠, 들고 갈 꽃다발을 고르는데 벌써 며칠이 걸린 여동생이 이 꽃다발은 어떠냐며 또 사진을 전송했다. 나는 그때 버럭 화가 나고야 말았다. 졸업식 두 번만 했다간 난리 나겠다며. 어쩜 그리 아빠 미니미냐며. 죄 없는 동생한테 화를 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방황하는 마음은 결국 실패를 줄이고 더 나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 결단 내린 일을 이렇게 남이 다른 말을 할 때마다 번복해 가며 나의 생각을 지지할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정성을 쏟는 방법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직장에서도 나는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누군가 곤란해하는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나는 적극적으로 답을 찾으려 애쓰는 편인데 누군가 질문을 던지는 경우 때론 내 일을 잠깐 제쳐두고서 찾아주기도 한다. 지나치게 문제해결 중심형 인간인 나는 당면한 문제를 얼른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을 심사숙고형의 방법으로 찾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런데 과연 내게 답을 얻은 그들이 내가 정성 들여 내놓은 답을 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가까운 예로 아빠와 동생을 보면 설문조사를 하듯 많은 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선 결국은 처음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의견 중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에 동의하는 의견만 취하곤 했다. 다수결로 할 것도 아니면서 많은 이에게 쉽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의 무게를 가늠하지 않고 쉽게 버렸다. 나는 그래서 가끔 화가 나는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질문하는 자의 불안까지 껴안은 그 고단함과 무거움을 생각지 못한다. 상황에 공감하며 위로하거나 처한 현실을 비관하고 있을 시간에 해결책을 찾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 생각하는 문제해결 중심형 인간의 고뇌를 잘 모른다. 마치 내게 닥친 일같이 진지하게 답을 찾느라 타인보다 더 조바심 내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왜 매번 이렇게 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인가. 쉽게 버릴 답이란 것을 알면서도 매번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후회의 감정을 타인에게 넘기며 가벼워지고 싶다.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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