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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Feb 19. 2023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인사발령자 명단에 내가 포함된 날. 예정된 회식을 가는 길엔 직원들과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작별인사를 궁리하느라 바빴다. 회식자리에선 어김없이 인사발령이 난 직원들을 한 명씩 세워 그간 소회를 밝히는 시간을 가질 것이고 그것이 부담이 된 나는 악상을 떠올리는 작곡가라도 된 양 괴로워했다.


저는 가마솥 같은 사람입니다. 데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한 번 데워진 열은 오래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람을 익히는 데도 마찬가지여서 그간 마음만큼 다가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저 데워지는 시간이었구나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 그간 데워진 열로 오래도록 잊지 않고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잠시만 안녕하겠습니다.


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잔을 번쩍 들곤 했다. 아. 끝났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 자리를 즐긴다. 잔을 놓고 있으면 가마솥이 아직 안 데워졌냐며, 끓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냐며 어서 다시 잔을 들라고 놀리곤 했다.

나는 늘 예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신중함이라 우겨보지만 세상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저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내가 아는 언니 세 명이 있다.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자기애가 강하던 언니 1, 자존심이 강하고 늘 생각이 많던 언니 2, 정 많고 누구에게나 사람 좋은 언니 3. 셋은 다른 듯 비슷해서 조심스럽게 서로의 경계를 지키며 인연을 이어갔다. 나는 한 살이 어리고 가장 나중에 합류한 탓에 그들의 탄탄한 관계 속에 깊이 들어가진 못하고 그저 동생같이 적당한 거리를 두며 그들을 관망하며 지냈다. 그런 그들 사이가 어느 날인가부터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니 2는 지역 방송국 라디오 작가로 잠깐 근무했었고 그 일에 꽤 자부심이 강했으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적합한 성격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무난히 해내기에는 불안과 긴장이 높아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좋아하는 글을 놓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글에 대한 미련을 마음 한 편에 두고 살아가던 중 언니 1과 언니 3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고 조금씩 안정되던 시기에 그들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기 시작하던 언니 2는 급기야 그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다가 결국 절교하듯 멀어졌다. 특별히 어떤 일이 원인이 되었다기보다 언니 2가 서서히 밀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언니 2는 그즈음 시에 몰두했다. 시를 써서 신춘문예로 등단하겠다 했다. 곁에서 바라보던 내 눈엔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친구들을 보는 언니 2의 자격지심이 느껴졌고, 한편 사람을 가장 알겠다고 시작하는 글을 쓰면서 사람을 버리는 언니 2가 조금 이해되지 않았다. 글로 성공해서 언젠가 보란 듯이 나타나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비뚤어진 마음을 달래는 길로 글을 택했다. 그 당시 나에게 글은 사람을 먼저 이해해야 되는 일이라 생각되었지만 언니에게 글은 마음을 둘 유일한 안식처 또는 자신을 빛내줄 유일한 탈출구였다.  


내가 처음 글을 쓴 것은 한창 일을 하던 때였다. 직장 생활 17년 차쯤 되었을 때 나는 일에 지쳐있었고 그 속에서 퇴색되어 가는 나를 지켜보며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은 문학상 공고를 보았는데 갑자기 왜 거기에 마음이 동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써 둔 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이 바빠 무언가를 쓸 여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중 가장 쉬워 보이는 동시를 한편 적어 응모 마지막날 극적으로 접수를 했고 의외로 작은 수상을 했다. 없는 동심을 밑바닥까지 내려가 길러와서 글로 옮기고 보면 자꾸만 글이 길어지곤 했다. 동심으로 짧은 시어에 많은 것을 담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미처 모르고 겁 없이 쓰다가 이내 지쳤다.


그리고 아이의 문제로 휴직을 하고 집에 있으면서 나는 마음을 닦아내는 마음으로 집안 곳곳을 닦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기나긴 기다림을 견디는 방법으로 끊임없이 물건들에 윤을 내듯 닦고 있던 날 불현듯 글로써 차고 넘치는 마음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이를 어렵게 등교를 시키고 쏟아져 나오는 마음을 적고 나면 조금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뱉어내기 시작한 것이 자꾸 글이 되었고, 빚어낸 문장 하나가 마음에 든 날은 한 번씩 삶이 반짝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염없이 아이만 기다리며 서랍 따위를 문지르고 있는 것보다 글로 마음을 닦아내는 일이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글은 시작되었다.


나는 지난날 글이란 무릇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 섣부른 단정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글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탈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론 그저 좋은 일이 되기도 했다. 하나의 이유로 시작되는 글이 없듯 쓰는데도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내가 써보고서야 비로소 글과 화해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마음과도 화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쓰게 되기까지도 물론 데워지는 시기가 길었다. 자꾸 나오려는 문장을 속으로 꾹꾹 누르며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 우선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겨우내 데워지기 시작한 글이, 어느 날 펄펄 끓어오르고 식더라도 그 열기가 오래도록 계속되기만을 바란다.



# 그림 출처 : 오늘을 그려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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