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여자 Feb 27. 2023

당신에게 기대어 봅니다


고즈넉한 길을 걷다가 그저 길일뿐인데 마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마음에 조금 달뜬 기분이 되는 것이 여행이라면 우연히 들른 새로운 길에서도 충분히 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오늘 처음 본 그 길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불현듯 그 길이 어떤 기억의 실마리가 되었다.  


여름. 걷고 있는 두 사람. 편안한 티셔츠에 옅은 색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여자와 한 남자가 나오는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기억나는 건 그 여자의 옷차림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그 배우의 이름이 특이했다는 것. 그녀가 슴슴하고 편안하게 생긴 인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일본인이었고, 배경이 일본이었다는 것. 그리고 늦여름 미지근한 바람의 느낌. 밀려온 파도에 잔잔한 모래알이 떠올랐다가 초연히 흩어지는 것과 같은 조금의 쓸쓸함.  


이 몇 가지의 단서를 들고 그 영화를 찾아 검색의 늪에 빠졌다. 한국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가 나오는 영화, 잔잔한 일본 영화, 한국인 20대 영화배우, 여름 영화...

여러 검색어를 넣어 찾아보아도 내가 생각하는 그 영화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그 영화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어떤 유튜버가 추천하는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생각이 났고, 그 유튜버의 이름이 특이했다는 것이 또 생각났다. 그런데 구독하는 유튜브 중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 짜내다가 내가 일본 음식 관련 영화 리뷰를 보다가 그 영화에 이르렀다는 것이 마침 떠올랐고 그렇게 추적에 추적을 거듭한 결과 그 영화를 찾아냈다. 아. 제목도, 출연자도 아닌 희미한 스케치만 생각나는 기억이라니.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 대개는 그런 형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단편적인 기억. 어떤 것을 보고 마주한 정물의 형태가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 느낌, 색상, 온도 등이 더해져 각색된 하나의 스케치. 기억이란 주입하는 모습 그대로가 아닌 내 방식대로 각색한 또 하나의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내어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그것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독립영화였다. 내 취향답게 조금 졸리고 아주 잔잔한 영화다. 자칫 놓치면 졸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보게 되는. 나는 이런 졸린 듯 이어지는 것들을 좋아한다.


이것이 떠올랐던 유일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특이했다고 기억되던 그녀의 이름은 김새벽이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영화 촬영에 앞서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일본의 소도시인 나라현의 고조시에 답사를 온 영화감독과 조감독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들은 오래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포착한 여러 가지 단편적인 모습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낸다. 흑백 영상이던 1부가 끝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가 2부에서는 컬러 영상으로 펼쳐진다. 영화란 것이 정지된 듯한 흑백이던 세계에 선명한 색을 입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영화는 고요히 있고자 하는 마음으로 당도한 곳에서 타인에게 오히려 내밀한 마음을 내비치게 되는, 단발성 만남에 그칠 상대에게 오히려 더 깊은 얘기를 하다가 그런 마음이 잠깐의 일렁임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작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부에서 감독이 눈여겨보고 영상을 가늠해 보던 장면들이 2부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엿볼 수 있다. 창작자의 눈으로 보고 탐색한 것이 창작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엔 우연과 이해가 존재한다.


감독이 소재를 얻어내는 것은 모두 우연의 결과이다.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옆모습에서, 누군가의 흘리듯 던진 말속에서, 우연히 길을 걷다가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감독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연신 사람이 중요하다며 사람을 찍겠다던 감독은 자신만의 이해를 통해 그 속에 사람을 녹여낸다. 사람의 마음과 그들의 감정이 정형화된 틀 속에서 정제된 형태로 존재한다. 어지러운 주변이 피사체가 되어 초점이 흐려지는 현실과 달리 매만져진 사각의 영상 속에 자신의 이해를 담아낸다. 그렇게 우연히 포착한 단서로 자신의 이해를 녹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글을 쓰는 일 또한 만들어내는 일이라 우연히 어떤 것의 단면을 포착해 내는 일이란 점에서 비슷한다. 그리고 그 속에 유의미한 이유를 녹여낸다. 내가 보여준 단면을 누군가는 자신의 이해를 담아 또 다른 창작물로 기억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포착된 실마리 하나에 희미한 스케치로 기억이 날 것이고, 그이의 깊이에 따라 때로 각색되어 더 나은 글로 나타날 것이다.


내 글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를 녹여 더 훌륭한 글로 각색하여 소화시킨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의 능력에 기대어 조금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용기를 내다보면 어느 날 나를 넘어선 이야기, 감히 타인의 삶을 넘보고 이해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 당분간 당신들에게 기대어보려 한다. 내가 쓴 흑백의 글에 색채를 입혀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