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꿈을 꾸는 법을 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던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루푸스라는 병을 얻은 뒤로는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사소한 외부의 변화에도 쉽게 무너졌고, 통증은 삶의 속도를 자꾸 늦추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시간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떠오른 것이 ‘나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말자’는 바람이었다
지금 나는 기술 탈취 사건을 다루는 공익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수많은 기술 피해기업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무너져 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억울함을 호소해도 잘 닿지 않는 목소리, 차갑게 보이는 숫자와 계약서 뒤에 숨은 절망을 가까이에서 느낄 때면, 마음 한쪽이 늘 무거워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익 활동’이라는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익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글은 자꾸 손에서 멀어져 갔다. 소송 서면과 법적인 문서가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며 세상과 연결되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글쓰기를 멀리했다. 돌이켜보면 글은 나를 살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다리였다. 내가 누군가의 글에서 감화를 받고 그 다리를 건너왔듯, 글로서 누군가가 반갑게 와줄 다리를 다시 만들고 싶다.
최근 국회와 정부에서 기술 보호 제도, 특히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디스커버리 도입 논의가 한창이다. 법과 제도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는 느리고, 사람들의 공감은 그보다 빠르다. 공감은 글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들기로 했다.
작가라는 이름은 아직 내게 어색하다. 하지만 글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다. 글은 논리만이 아니라 체온을 담는다.
루푸스는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픔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길을 발견했다. 병이 내게 멈춤을 주었지만, 그 틈에서 나는 꿈을 다시 배웠다. 꿈은 혼자 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때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프고 바쁘지만, 그래서 더 글을 쓰고 싶다. 제도의 언어를 사람들의 일상의 언어로 바꾸고 싶다. 기술을 빼앗기고 무너져가는 기업들의 목소리를 따뜻하게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다. 작은 문장이 모여 누군가의 오늘과 내일을 지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다시 펜을 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글은 나를 살린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를 살리는 문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따뜻하게 체온을 담아 글을 쓴다. 이것이 내가 오늘도 꿈을 다시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