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림동, 낡은 고시원 골목 끝 작은 방. 책과 공책,
연필과 계산기, 그리고 그녀의 스탠드 불빛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P는 조금 이쁘장했지만, 그 덕분에 세상이 호락호락 열리지는 않았다.
P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사랑했고, 정의로운 변호사가 나오는 법정 드라마까지 여러 장르의 영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린 시절 P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밤이면 어둠 속에서 화면 속 정의와 모험을 따라 숨을 죽였고, 세상을 바꿀 방법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피범벅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 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고 후 수사기관의 무심함과 때때로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를 본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 그 순간,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가 등장해 권리를 지키는 영화를 보며 마음속에 불이 켜졌다.
“나는… 정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때부터 P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신림동 고시촌에서 매일같이 쌓아 올린 노력은 SKY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주류로 분류되었지만, 그녀의 내적 힘은 점점 단단해졌다. 그리고 마음속 은빛 깃털이 생겼다.
그것은 영화 속 정의로운 변호사와 외할아버지 사건에서 느낀 슬픔과 분노, 자신이 선택한 길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결합되어 생긴 상징이었다. 은빛 깃털은 그녀가 스스로를 지탱하고, 타인과 세상을 향한 사랑과 정의를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내적 나침반이었다.
2010년, 28세.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차가웠다. 연수원 첫날, 강의실은 명문대 출신 연수생들로 가득했고, 옷차림과 말투, 걸음걸이까지 세련되고 자신감이 넘쳤다. P는 자신이 SKY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꼈다. 작은 농담에도 웃음 속에는 ‘비주류’라는 시선이 숨어 있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노트북을 펼치자 흘끗 쳐다보는 눈길이 이어졌다. 겉으로 친근했지만, 그 속에는 ‘이 정도 노력으로 따라올 수 있을까’ 하는 거리감이 숨겨져 있었다. P는 잠시 소외감을 느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상담 시간, 연수원 교수는 P에게 진지한 진로 상담 대신 이렇게 말했다.
“20대 후반이잖아, 결혼 해야지. 문방구에서 학용품 고르듯이, 이 곳에서 좋은 남자 하나 선택해야지, k는 어떠니?.”
P는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동시에 결심했다. 그녀는 더욱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많은 한국 변호사가 선택하지 않는 힘든 길,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P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미리 계획했다. 러시아의 모 대기업에서 변호사 실무 수습을 경험하며,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맛보았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야와 실무 감각을 주었다. 수많은 동료가 국내에서 안전한 길을 선택할 때, P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고, 연수원 수료와 동시에 대형 로펌 해외지사로 자진해 나섰다.
해외지사에서 P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몸을 혹사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고, 회의와 서류 검토가 끝나면 바로 다음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동료들이 쉬거나 늦게 출근할 때에도, 그녀는 일찍 출근했다. 밤이면 사무실 조명이 꺼져도 스탠드는 계속 켜져 있었다.
그 노력 덕분에 해외지사는 흑자를 기록했고, P의 능력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몸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손목과 손가락은 붓고 저린 느낌이 손끝을 찌르는 듯했고, 아침이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심장은 두근거려 회의실에서도 숨이 막혔다.
피부에는 붉은 발진이 퍼졌고, 관절은 불타는 철사처럼 아팠다. 잠깐 눈을 감으면 어지럼증과 함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참으려 했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했다.
“멈추고 내 안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야.”
그렇게 P는 루프스라는 병을 얻었다. 몸의 고통은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축복이었다.
몸을 회복하고자 그녀가 선택한 길은 공익법인이었다. 피해 기업과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 그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또 다른 시험이었다. P가 마음과 시간을 쏟을수록 세상은 두 얼굴을 보였다.
세상의 일부는 P의 성실함과 헌신을 이용했다.
그녀가 맡은 업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정하거나, P가 지치고 흔들릴수록, 일부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해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악의적 소문과 이간질이 퍼졌다. 누군가는 P를 예민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왜곡했고, 자신들의 게으름를 숨기기 위해 선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그녀 주변을 잠식해 갔다.
심지어 그녀가 도움을 준 피해 기업 속 일부 조차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이기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한쪽으로만 차갑지는 않았다.
P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말없이 작은 배려와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그녀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도록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칭찬이나 소문으로 그녀를 평가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진심과 헌신을 믿고 지켜주었다. 그 덕분에 P는 자신이 걷는 길이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세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 흔들려 무리하게 업무를 떠맡았던 시기, 루프스 증상이 악화되며 몸과 마음이 지친 시기, 믿었던 이의 악의적 소문과 이용으로 마음이 흔들렸던 시기. 그때마다 P는 깨달았다. 진정한 힘은 타인의 왜곡과 평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루프스의 아픔은 단순한 장애가 아니었다. 그것은 속도를 늦추고,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축복이었다.
P는 손목과 손가락이 붓고, 관절이 불타듯 아프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 고통도, 나를 나답게 만드는 한 부분이야.”
마침내 P는 타인을 향한 사랑과 정의감으로 내면의 중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방 책상 위에 은빛 깃털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 깃털은 어린 시절 영화 속 정의로운 변호사에게서 느낀 용기, 외할아버지 사건 이후 생긴 정의감,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겪은 아픔과 시련을 담고 있었다. P는 손끝으로 깃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마음의 중심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향한 마음 위에 있어.”
책상 위 은빛 깃털은 조용히 반짝였다.
그 빛은 P가 세상을 향해 펼친 사랑과 정의의 마음을 담아, 오늘도 그녀의 길을 지켜주고 있었다.
P는 알았다. 세상의 한편이 악의적이고 차가워도,
다른 한편의 세상은 선의와 따뜻한 빛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은빛 깃털처럼 마음속 중심을 지키는 한,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 그녀의 길은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