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비가 막 그친 오후,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서현은 오래된 건물 정문 앞에서 한 번 더 신발을 털었다.
물이 묻지 않은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디딜 때마다
발끝에서 어딘가로 스며드는 축축한 냄새가 올라왔다.
언젠가부터 이 건물은 그에게
작은 목소리들이 가라앉는 깊은 우물처럼 느껴졌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로비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조명을 품고 있었다.
넓게 번진 은은한 노란빛 아래,
이사장은 커다란 화분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그는 직원들을 볼 때마다
꼭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갑게 웃곤 했다.
“서현 씨, 오늘도 고생 많아요.
여기 공기가 좀 답답하죠? 공기 청정기를 좀 켤까요?
사람들이 편히 오갈 수 있게 더 환하게 바꿔야 하는데 말입니다.”
겉으로는 친절함과 따뜻함이 묻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화분 잎을 스치는 손동작은
유난히 조심스러운 척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들을 과시하려는 기묘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마치 ‘이곳의 모든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는 말을
손끝으로 속삭이는 것처럼.
서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그는
말의 내용보다 말 뒤에 숨은 결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사장의 미소는 언제나 부드러웠지만,
그 미소의 가장자리는 이상하게도 투명하지 않았다.
마치 안쪽에 작은 날이 숨어 있는 듯했다.
“이 꽃 좀 봐요.”
이사장은 창가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어제 직원들이랑 직접 심었어요.
세상이 각박해도 이런 작은 생명만 보면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는 꽃대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그 순간 서현은 알았다.
이사장이 꽃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꽃을 가꾸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꽃은 단지 장식품일 뿐,
자신의 선량함을 증명하는 무대 소품 같은 존재였다.
“서현 씨 같은 분이 있어서
우리 기관이 유지되는 겁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 말은 겉보기엔 칭찬이었지만
그 칭찬이 가리키는 방향은 늘 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당신을 키운 건 나야’라고 말하는 듯한 얄팍한 계산이 숨겨진.
서현은 잠시 그의 말을 흘려보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잎 위에서 구르며 떨어지고 있었고,
멀리서 누군가가 가쁜 숨을 내쉬며 입구로 뛰어오고 있었다.
문이 크게 열리고,
젊은 직원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사장님, 긴급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피해자 측에서 서류를 추가 제출했다는데…
현장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꽤 격해졌다고 합니다.”
짧은 보고였지만
이사장은 이내 얼굴을 단정하게 고쳐 세웠다.
걱정에 찬 듯, 배려 깊은 듯.
“아이고, 또 힘들게 됐군요.
그분들 많이 불안하겠어요.
서현 씨,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도와드려야죠.”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달랐다.
빛 아래 비쳐 보이는 검은 점 하나처럼,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욕망이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무너지는 순간
자신이 ‘구원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장면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이었다.
서현은 그 사실을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오래된 감각이 경고하듯
이사장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조용히 상황을 가늠했다.
건물 뒤편의 복도는
로비와 달리 딱딱한 형광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빛이 잘 닿지 않는 구석,
마치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들이 모여드는 곳.
이사장은 환한 미소를 유지했지만
그가 걸을수록
복도에 흐르는 공기에는 묵직한 단서들이 붙었다.
서현은 그 기척들을 조용히 수집했다.
어떤 사람의 진실은 말보다
말 아래 깔린 정적에서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울분에 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말리며 서성였다.
안쪽에서 서류가 책상 위에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서현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이사장은 천천히 미소의 각도를 올렸다.
그리고 긴 하루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