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구석에 기타가 하나 서 있다.
작년 11월, 중고나라에서 15만 원 주고 데려온 녀석이다.
검은 케이스 모서리는 벌써 해지고, 헤드에는 떼지 못한 배송 스티커 자국이 남아 있다.
보면 볼수록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거실 가구들과도, 내 나이와도, 내 손재주와도.
처음 딸한테 들켰을 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아, 이거? 그냥 취미 생활 좀 하려고."
입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은 뒤늦게 따라왔다.
그 말, 완전히 거짓말이다.
딸 결혼식 때 쓰려고 산 것이다.
아직 남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결혼식이냐고?
나도 그게 우습다는 건 안다.
근데 말이다, 마음이란 게 항상 타이밍을 지키진 않는다.
먼저 준비해두고 싶은 것들이 인생에는 있다.
그게 나에게는 기타였다.
딸은 스물여섯.
출근하고, 사람 만나고, 주말엔 넷플릭스 보다가 잠들고.
살림은 제 몫대로 굴러가는 나이고,
나는 그 주변을 빙빙 맴돌며 간간히 부딪혀보는 위성 같은 존재다.
"아빠 저녁 뭐 먹어요?"
이 한마디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는 그 사소한 동작마다,
아직 내 품 안 어딘가에 머무르는 딸이 보인다.
결혼?
딸은 그런 말 한 번도 꺼낸 적 없다.
사실,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달이었다.
딸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고, 나는 문에 기대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 고개를 살짝 젖혀 나를 보고 웃었다.
"왜요?"
그 한마디에, 내 심장이 한 번 툭 내려앉았다.
아, 이 아이도 언젠가 떠나는구나.
언젠가 누군가에게 팔짱을 끼고, 내 손을 조용히 놓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구나.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축의금 봉투 들고 서성거릴까.
구석에 앉아 "우리 딸 예쁘죠?" 하며 괜히 아는 체할까.
그런 아버지이고 싶지 않았다.
딸의 인생 가장 빛나는 무대에서 나는 조연도 아니고 장식품도 아니고 그냥 '아빠'이고 싶었다.
그래서 기타다.
유튜브에서 "결혼식 아버지 기타 연주"를 찾아봤다.
한 아버지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음은 계속 흔들리고 박자는 뛰고 넘어지고, 그런데 신부가 무대 위로 달려가 아버지를 꽉 안았다.
그 영상이 끝난 뒤에도 내 가슴은 한참 동안 울렸다.
서툴러도 되는구나.
아버지의 사랑은 원래 삐걱거리며 전해지는 거구나.
문제는, 나는 악기를 다뤄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 리코더를 허공에 불어본 게 전부다.
지금은 유튜브가 선생이다.
"왕초보 기타 1일 차"
화면 속 손가락은 우아하게 뻗는데 내 손가락은 한 마디씩 짧아 보인다.
C 코드 하나 잡는데도 손끝이 불났다.
줄이 손가락을 파고들며 고추장 묻힌 것처럼 화끈거렸다.
처음 일주일은 그냥 줄만 튕겼다. 소리 나는 게 좋았다.
나도 뭔가 낼 수 있구나, 울림을 만들 수 있구나.
그러다 딸이 방에서 나와 말했다.
"아빠, 시끄러워요."
그 뒤론 문 닫고 연습한다.
그래도 좋다.
딸이 한마디 해줬다는 게, 내가 아직 딸의 생활 반경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두 달 정도 지나자 C, G, Am 이 세 친구는 그럭저럭 손에 붙었다.
찾아보니 이 세 개만 알아도 칠 수 있는 노래가 생각보다 많다.
그래도 내 목표는 '딸에게'다.
그 노래로 딸을 보내고 싶다.
근데 F 코드는 아직도 악마다.
손가락이 안 닿는다.
비웃듯이 튕겨나간다.
처음엔 짜증 났는데 요즘은 그냥 웃긴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어제 저녁, 딸이 지나가다 물었다.
"아빠, 대체 왜 기타 쳐요? 갑자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냥."
딸은 웃었다.
"아빠 실력 늘긴 했어요. 처음보단."
그 말이 꽤 멀리 갔다. 기쁘고, 창피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나는 딸이 결혼한다고 말하면 좀 무너질 것 같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아직 안 보내고 싶다.
딸이 충분히 행복해지기 전엔 내 품 한 귀퉁이라도 남겨두고 싶다.
그래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다.
'그때 뭐라도 할걸' 그 말은 평생 상처처럼 남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연습한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딱 30분.
방 안에서 줄을 튕기며 손끝에 굳은살이 박힌다.
아프지만, 어쩌겠나.
유튜브 댓글 하나를 북마크해 두었다.
"저도 딸 결혼식 때 기타 쳤습니다. 떨려서 중간에 한 번 멈췄는데, 딸이 울면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 댓글을 읽을 때마다 기타를 다시 집는다.
그리고 나는 안다. 언젠가, 내 소리도 딸에게 닿을 거라는 걸.
어젯밤, 딸이 냉장고 문 열며 말했다.
"아빠 라떼 사주세요."
나는 편의점 가서 1+1 행사 붙은 라떼 두 개를 집었다.
하나는 내 거.
둘이 거실에 나란히 앉아 딸이 회사 이야기를 했다.
상사가 어쩌고, 프로젝트가 어쩌고.
나는 그냥 듣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근데, 그게 참 좋았다.
아직 딸이 내 옆에 앉아 있으니까.
기타는 내일도 칠 거다.
모레도.
F 코드는 여전히 안 되는데, 뭐 어쩌겠나.
손가락 짧은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계속 눌러볼 생각이다.
딸이 "아빠 저 결혼해요" 그 말 하기 전까지는.
그 말 듣고 나면, 아마 나는 한동안 기타 못 칠 것 같다.
손이 떨려서.
근데 결혼식 날엔 칠 거다.
떨려도.
그게 내가 준비한 전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