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몇 개였다.
5천 원 남짓.
무인매장에서 누구나 쉽게 집어 들 수 있는, 여름이면 손에 물이 흐르고 입가에 달콤함을 남기는 그 아이스크림.
그런데 그게 한 열여덟 살 소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난 9월 23일 새벽, 충남 홍성의 한 집에서 고2 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범한 아이였다.
학생부에는 "늘 맑고 명랑한 태도로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이 예쁜 학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교우 관계 원만, 낙천적 성격. 그런 아이가 자기 방에서 목을 맸다.
기사를 처음 봤을 때 이해가 안 갔다.
5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때문에?
그런데 기사를 계속 읽다 보니, 아니 이게 단순히 '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절도는 절도지.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맞는 말이다.
누군가는 되묻는다.
"그래도 죽을 죄는 아니잖아." 이것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 두 말 사이에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따지며 어느 한쪽을 탓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착각 속에 산다.
하지만 그 아이가 목숨을 끊은 순간, 이건 단순한 범죄와 처벌 얘기가 아니게 됐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잔혹한 구조가 드러났다.
점주도, 공부방 선생님도, 동네 사람들도, 경찰도, 제도도, 그리고 우리도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질문은 이제 "누가 잘못했나"가 아니라, "누가 이 아이를 죽였나"다.
아이는 잘못했다.
이건 분명하다.
그 아이는 학교 근처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2~3번 계산 안 하고 물건을 가져갔다.
본인도 친구한테 보낸 카톡에서 "돈이 없어서 할인점에서 물건 훔쳤다"고 인정했다.
5천 원 정도라고 했다.
절도는 절도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게 교육하고 고쳐줘야 할 문제지, 목숨 걸 만큼 비난받을 일인가?
열여덟 살이면 아직 충동 조절도 서툴고,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나이다.
그때 어른들이 해야 할 건 "한 번 실수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거 아닌가.
실수를 돌이킬 기회, 책임지는 법을 배울 기회, 부끄러움을 견디고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게 어른의 역할 아닌가.
하지만 이 사건에선 그런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 실수를 확대하고 과장해서 아이를 몰아붙였다.
점주도 피해자였다.
이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무인매장 운영하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정말 답답하다고 한다.
인건비 아끼려고 무인으로 하는 건데, 절도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 몫이다.
소액이라도 계속 쌓이면 장사가 안 된다.
경찰한테 신고해봤자 "과자 몇 개 가지고 그게 일이냐"는 식이고.
그래서 점주들이 CCTV 돌리고, 화면 캡처하고, 범인 찾으려고 애쓴다.
손해 만회하고 싶은 마음, '이번엔 제대로 가르쳐야지'라는 생각.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그 점주는 선을 넘었다.
법이 금지하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CCTV 캡처 사진을, 그것도 미성년자 얼굴이 그대로 나온 사진을 아는 공부방 선생님한테 건넸다.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까 누가 아는 애인지 찾아달라고.
모자이크도 없이, 가림도 없이, 한 미성년자의 얼굴을 무방비로 노출시켰다.
"저 얼굴 아는 사람?" 그 질문 하나가 작은 동네 전체에 불처럼 번졌다.
피해자라고 해서 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사적 제재, 그건 또 다른 가해다.
공부방 선생님은 뭐 했나.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보호해야 할 사람 아닌가.
근데 그 사람은 점주한테 받은 사진을 학생들한테 보여줬다.
"알아봐라, 절도범이니 찾아야 한다"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그 사람은 아이들한테 '낙인 찍는 법'을 가르쳤다.
왕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몸소 보여줬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누가 누군지 다 아는 작은 동네다.
홍성군이 그렇다.
사진은 삽시간에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얼굴, 신상, 다.
결국 그 사진은 피해 학생 오빠한테까지 갔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나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어려서.
한 사람의 실수를 재미로 소비하고, 가십으로 치장하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 누군가한테 칼이 되는 줄 모른다.
그 칼날 끝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경찰은? 제도는?
소액 절도는 우선순위가 낮다.
"과자 몇 개 가지고요?" 이런 반응, 실제로 많이 듣는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경찰서 가봤자 시큰둥하다고, SNS에 하소연하는 글 많이 봤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결하려 든다.
공권력이 안 움직이니까 내가 한다, 이렇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방식이 법의 선을 넘어간다.
개인정보보호법은 명확하다.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그게 제때 작동했나? 아니다.
법의 빈자리를 감정과 사적 제재가 채웠다.
물론 이 사건 이후에는 경찰이 수사했다.
점주 조사 마쳤고, 공부방 선생님은 변호사 선임했고, 곧 검찰로 넘어간다고 한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아이는 이미 죽었는데.
우리는?
작은 동네는 때로 따뜻한 공동체다.
그렇지만 때로는 가장 잔인한 감옥이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곳에서,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의 낙인이 된다.
맘카페 댓글들, 커뮤니티 반응들 보면 항상 비슷하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혹시 점주가 합의금 노리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이런 식.
우리는 심판자 되기를 너무 좋아한다.
가해자 처벌하고 피해자 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비극 구경하고 분노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 시선이 아이한테 속삭인다.
"너는 더럽혀졌어.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어."
9월 22일, 아이 오빠가 엄마한테 사진 유포 사실을 알렸다.
엄마는 점주한테 전화했다.
다음 날 만나서 해결하자고 했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못 잤다.
사망 하루 전 친구한테 보낸 카톡에 "돈이 없어서 할인점에서 물건 훔쳤다"고 썼다.
그리고 자살하기 바로 직전, 친한 친구 2명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홍성에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냐."
"학교에 다닐 수가 없다."
"떨어져 죽어야 될지 목을 매야 될지 고민이다."
친구들이 말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학교 다시 못 갈 거라는 두려움.
동네에서 마주칠 시선.
부모님한테 들킬 부끄러움.
자기가 이제 사람들한테 '도둑'으로 찍혔다는 현실.
한 번 실수한 게 인생 낙인이 되고, 미래의 문이 다 닫힌 것 같았을 거다.
9월 23일 새벽 5시 30분쯤, 그 아이는 자기 방에서 목을 맸다.
누가 이 아이를 죽였나?
아이? 아니다.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점주? 부분적으로 맞다.
피해자였지만 법의 선을 넘어 공개 처형했다.
공부방 선생님? 책임 있다.
아이들 보호해야 할 사람이 낙인 찍는 법을 가르쳤다.
경찰? 제도? 무관하지 않다.
방치한 자리를 사적 제재가 채웠다.
동네 사람들? 우리?
방관했고, 수군거렸고, 그 아이한테서 숨 쉴 공간을 빼앗았다.
정답은 없다.
아니, 정답은 '우리 모두'다.
이 비극은 한 사람의 악의가 만든 게 아니다.
개인의 잘못을 사회가 부풀리고, 절도를 범죄가 아니라 인생 종말로 만드는 구조가 낳은 결과다.
우리는 작은 비용 아까워한다.
행정력 투입 싫어한다.
그러면서 가장 약한 존재한테 그 비용을 떠넘긴다.
부모가 책임 못 지면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데, 우리는 준비 없이 아이한테 먼저 책임을 물었다.
그 아이는 배웠다.
자기가 보호받을 곳이 없다는 걸.
단 한 번 실수로 세상에서 추방당한다는 걸.
그리고 어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책임한지 보여주고 떠났다.
사건 이후 유족은 점주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공부방 선생님을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더 참담한 건 가해자들이 진짜 사과를 안 한다는 거다.
변호사 선임해서 대응 중이라는 소식만 들린다.
아이 아버지는 말한다.
"5천 원 정도 훔쳤는데, 우리 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까?"
"사랑하는 딸을 떠나보낸 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가족의 고통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습니다. 딸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번 사건이 다시는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홍성의 한 자영업자(51)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덩치는 크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어린 애들 아닙니까. 물건 가져간 건 잘못이지만, 고2면 한창 민감한 사춘기 때인데. 한두 다리 거치면 누구 집에 누구다 다 아는 좁은 동네에서, 훈육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훈육했어야 했다.
가르쳤어야 했다.
기회를 줬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처형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죽었다.
누가 이 아이를 죽였나?
우리가 죽였다.
우리가 만든 구조가, 우리가 외면한 순간들이, 그 아이 숨을 하나씩 끊어놨다.
이제 또 묻는다.
다음 아이는 누구인가?
우리가 또 누구를 "재수 없게 걸린 애"로 만들 건가?
이 질문 피해갈 수 있는 어른은 없다.
우리 모두가 이 구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이 비극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 비극 막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이들이 한 번 실수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게, 우리가 뭘 바꿔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