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익어가는 시간

by 글쓰는곰돌이

요즘은 별것 아닌 일에도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된다.

아침마다 포트에 데운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 창가에 서면, 유리창 너머로 공기가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먼지가 떠다니고, 옆집에서 누군가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얇게 들리고, 그 적막과 생활이 뒤섞인 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예전에는 눈앞의 일들을 따라가기에도 하루가 짧았다.

생각이라는 건 사치였고, 멈춘다는 건 게으름이라 여겼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생각은 앞서 달려가고 몸은 그 뒤를 따라오느라 숨이 찬다.

그 엇박자에서 슬며시 웃음이 새지만, 곧 마음 어딘가가 텅 비는 기분이 들곤 한다.

젊은 시절엔 ‘인생은 길다’는 말이 위로였는데, 지금은 그 길이가 마치 손에 쥐고 있는 실뭉치가 천천히 더 무겁게 감기는 느낌이다.

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오래 산다는 건 그 길을 내 걸음으로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한때 ‘욜로’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 순간을 잡아 두 손에 꼭 쥐자는 외침.

그때 나는 그것을 철없고 무모하다고 여겼다.

회사 휴게실에서 후배들이 즉흥처럼 제주행 항공권을 결제하던 오후, 나는 속으로 ‘나중을 생각해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 ‘나중’이라는 허상을 너무 오래 붙들고 살았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을 위해 이미 살고 있는 날을 줄여 쓰며. 젊은 시절에만 가능한 체력과 무모함, 감각과 들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지금의 나는 돈을 쓰는 법을 늦게 배운 사람 같다.

월급날이면 모바일 뱅킹을 열고 잔고를 확인하는 행위가 일종의 안정 의식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숫자는 안심이고, 대비였고, 책임이었다.

언젠가 그 돈을 쓰며 마음껏 숨을 쉬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유가 찾아온 지금,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설렘은 조용히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서른 중반, 대흥동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1만 원짜리 안심 스테이크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환해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더 좋은 음식을 먹어도, 감흥은 입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희미해진다.

사람은 혀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


세상이 길어졌다.

오래 산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 아니라 천천히 배워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밤에 과식을 하면 이틀이 아프다.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이 먼저 상황을 말해준다.

예전에는 새벽까지 놀고 다음 날 멀쩡히 출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건 능력이 아니라 젊음이었다.

젊음은 이유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부모 세대가 오래 남아 있게 되면서 서로의 세대가 나란히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갈등도 자연히 길어졌다.

서로의 옳음과 억울함이 오래 남아 발효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조금씩 외롭고 조금씩 불안하고 조금씩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욕심이 커져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유는 크지만, 마음은 한 번에 넓어지지 않는다.


젊을 때는 ‘조금만 더 참자’가 나의 습관 같은 문장이었다.

시험을 위해, 취업을 위해, 가정을 위해, 아이를 위해 참았다.

참음이 쌓여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인생이 나를 충분히 빛나게 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쉽게 답을 못하게 된다.

오래된 앨범을 넘기다 보면, 어설픈 포즈로 웃고 있는 젊은 날의 내가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이상하게도 눈빛은 생생했다.

아마 그때는 시간이 나의 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우리는 ‘나중을 위한 지금’을 너무 오래 배워온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나중’은 언젠가 자연스럽게 지금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오늘이 이미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60을 앞두고 나는 조금 느리게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너무 세게 걸리지 않고, 너무 기울어지지 않게.

대비하며 산 삶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남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마음은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이제는 ‘견디기’만으로는 하루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날 여행은 좋다 했지만, 이제는 걸음이 짧아지니 그만큼 더 천천히 풍경을 보게 된다.

많이 사랑하라 했지만, 이제는 말 대신 곁을 내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배운다.

꿈을 꾸라 했지만, 이제는 잠이 들기 전 손등에 머무는 온기를 먼저 느끼게 된다.

인생은 지나가야 알아지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도 후회만 하며 살기엔 남은 날이 참 아깝다.

이제는 너무 움켜쥐지 않고, 너무 놓아버리지도 않으며, 적당히 머무는 법을 배우고 싶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젊음이 지나갔다고 해서 인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멀리 있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려고 한다.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해 테이블 위 먼지를 천천히 띄우는 모습, 그런 장면 하나에 마음을 두고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잘 산다는 건 크게 이뤄놓는 일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에게 덜 미안한 하루를 쌓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문장을 적고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아직 잃지 않은 따뜻함의 한 조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