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구원을 받았을까?

by 글쓰는곰돌이



연후 전에 인사를 갔던 목사님의 서재에서 루터의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목사님의 성향을 미루어 봐도 있어서는 안되는 곳에 이 책이 있는 것 같아 의아스러웠지만 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책이어서 빌려오게 되었다.





마틴 루터의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


그가 1543년, 쇠약한 말년에 쏟아낸 증오의 결정체.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루터의 글자 사이로 스며드는 독기가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종교개혁의 불꽃을 지핀 그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체계적인 증오를 품게 된 걸까.


그리고 그보다 먼저 머릿속을 두드린 건 1525년의 그 비극이었다.





‘농민전쟁’


'봉기가 진압되었다'는 한 줄로는 도저히 정리할 수 없는, 피로 얼룩진 학살의 현장들.


그 학살을 루터가 직접 부추겼다는 사실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루터의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과연 그의 어두운 면까지 덮을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 질문을 계속 곱씹었다.


농민들의 비명 소리와, 유대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독을 토해낸 그의 펜 끝이, 그의 구원마저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1524년 말부터 시작된 농민전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루터의 개혁 사상이 민중의 고통과 맞닿아 폭발한 결과였다.


농민들은 중세 말기의 사회적 압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다.


영주들의 과도한 세금, 토지 착취, 강제 노동으로 인해그들은 노예처럼 살았고, 흉작과 전염병이 더해지면서 절망이 켜켜이 쌓여갔다.


루터의 가르침이 거기에 불을 질렀다.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교리,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외침.


이것이 농민들에게는 영적 자유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평등을 약속하는 말처럼 들렸다.


농민들은 루터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95개 논제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듯, 그들도 영주들의 압제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목청껏 외쳤다.





봉기는 스위스 국경 근처 슈바벤 지역에서 시작되어 라인강 유역, 튀링겐, 작센으로 번져나갔다.


농민들은 ‘12개 조항’을 써서 요구를 내세웠다.


그건 막연한 불만의 나열이 아니었다.


세금 철폐, 토지 공동 이용권, 목사 선임권, 사냥·낚시·벌목의 자유.


모두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적 공정'을 내세운 주장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는 구절을 앞세우며, 영주들의 특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토마스 뮌처처럼 급진적 재세례파 사상가나, 플로리안 가이어같은 기사 출신의 농민운동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루터를 '형제'라 불렀고, 그의 개혁이 자신들의 고통도 함께 끝내줄 거라고 믿었다.





루터도 처음에는 그 불만에 공감했다.


1525년 초 ‘평화에 대한 권고’에서 그는 영주들을 "폭군"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영주들의 압제는 비기독교적이며 농민들의 불만은 정당하다. 그들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썼다.


농민들을 "가난한 형제들"이라 부르면서, 영주들에게 개혁을 촉구했다.


이 글은 농민들에게 또 한 번 불을 지폈다.


루터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봉기는 빠르게 번졌고, 수만 명의 농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낫, 도끼, 창, 심지어 몇몇은 훔친 총포까지 손에 들었다.


그러나 봉기가 폭력으로 치닫자, 모든 것이 뒤집혔다.


1525년 4월 바이엔스베르크 사건이 결정타였다.


농민 지도자 '작은' 야콥 로르바흐 휘하의 무리가 항복한 귀족 7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스피어 런"이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했다.


포로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강제로 달리게 한 뒤 쓰러지면 찔러 죽이는 식이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루터는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개혁 운동 전체가 무너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루터는 본래 사회 질서를 최우선에 두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서 13장을 늘 인용했다.


"하나님이 세운 권위에 복종하라."


그의 '두 왕국' 이론인 영적 왕국은 믿음으로, 세속 왕국은 권위와 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이 시점에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폭력적인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죄악이었다.


루터는 더 이상 농민들을 '형제'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복음을 빙자한 강도와 살인자 무리'가 되어버렸다.





1525년 5월, 루터는 ‘살인적이고 약탈적인 농민 무리에 대하여’를 썼다.


이 소책자는 단순한 비난을 넘어, 사실상 학살을 부추기는 선동이었다.


그는 농민들을 "강도와 살인자 무리", "미친 개"로 규정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는 찌르고, 베고, 죽이라. 비밀리에든 공개적으로든. 자비를 베풀지 말라.


반항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독이 되고 해로운 악마 같은 존재다. 미친 개처럼 죽여라.


이 학살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들이 복음을 빙자해 신성모독을 저질렀다."


영주들에게는 "농민들을 미친 개처럼 죽이라"고 촉구했고, "농민들은 지옥에 갈 자들"이라며 완전한 말살을 독려했다.





루터의 펜은 불길처럼 퍼졌다.


귀족들은 이 글을 면죄부 삼아 대규모 진압에 나섰다.


그리고 그 진압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프랑켄하우젠 전투였다.


사실상 이 전투는 '학살'에 가까웠다.


1525년 5월 15일,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 6,000~10,000명이 언덕 위에 진을 쳤다.


낫과 도끼와 창이 전부였고,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민중이었다.


맞은편에는 헤센 란트그라프 필립 1세와 작센 게오르크 공작의 연합군인 잘 훈련된 란츠크네히트 용병들, 기병, 그리고 대포가 버티고 있었다.





협상이 진행 중이었지만 왕자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대포가 농민 진영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농민들이 친 마차 방벽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기병들이 돌진하며 도망치는 농민들을 베고 찔렀다.


언덕 아래로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도 그 길은 '피의 골짜기'라 불린다.


도망치다 잡힌 자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고, 포로로 잡힌 600명 중 절반은 다음 날 참수당했다.


단 두 시간 만에 3,000~6,000명, 일부 추정으로는 8,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왕자 측 사상자는 고작 6~12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비슷한 학살은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알자스 지역에서는 1525년 5월 17일 자브른 전투에서 농민 18,000명이 2,000명 이하의 병력에게 몰살당했다.


포로들은 고문을 당한 뒤 공개 처형되었고, 마을은 불타고 약탈당했다.


튀링겐의 뮐하우젠 근처에서도 농민들은 대포와 기병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쟁 전체로 보면 70,000~100,000명의 농민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에서 죽은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패배 이후의 보복·처형·학살이었다.


마을마다 농민 지도자들이 고문당한 뒤 공개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배상금을 짊어져야 했다.


귀족 한 명은 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물었다.


"모든 농민을 다 죽이면 누가 우리를 위해 일하겠는가?" 그만큼 무자비했다.





루터의 소책자는 이 모든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나중에 "너무 가혹하다고? 반항은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이 매 순간 멸망할 수 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루터를 배신자라고 저주했다.


그의 개혁은 '영적 자유'를 약속했건만, 세상의 고통 앞에서 돌아온 말은 "권위에 복종하라"는 명령뿐이었다.


루터의 믿음은 약자들의 피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피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루터의 말년은 또 다른 증오로 물들었다.


건강은 나빠졌고, 개혁에 대한 실망은 쌓여갔다.


1543년에 쓴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은 65,000자에 달하는 증오의 결정체였다.


젊은 시절인 1523년,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에서 루터는 유대인에게 관용적이었다.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라. 개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썼고, 유대인을 "우리 주님의 사촌이자 형제"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설 수 있다고 믿었으며, 초기에는 중세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의 기대대로 개종하지 않자, 태도는 점진적으로 바뀌었다.


1530년대부터 루터의 글에는 유대인 비난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약을 왜곡"하고 "기독교인을 속인다"는 확신이 생겼고, 유대인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느낀 패배감이나 개종 실패의 좌절이 그 증오를 점점 키워갔다.


1543년 이 책에서 루터는 유대인들을 "저주받은 자들", "악마의 자식", "거짓말쟁이", "독사", "더러운 돼지"로 묘사했다.


"유대인은 구약을 왜곡하고 예수를 모독하며 기독교인을 증오한다."

"그들은 악마의 똥을 숭배하며 기독교인을 해친다."


그는 유대인들을 "기독교의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죄"라고까지 썼다.


중세의 반유대주의 유산인 혈액 모독(유대인이 기독교 아이를 죽여 피를 쓴다는 소문), 우물 독살(유대인이 전염병을 퍼뜨린다는 전설), 고리대금업 비난 등을 그대로 가져와 자기 논리 위에 얹었다.





가장 끔찍한 부분은 '7가지 행동 계획'이었다.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체계적인 제거 프로그램이었다.


시나고그(유대교 학당)와 학교를 불태우라.

"유대인들의 예배당은 악마의 소굴"이며 불태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유대인 집을 파괴하고 한 곳에 가두라.

"안전한 곳"에 격리되어야 하며, 자유롭게 살 자격이 없다고 했다.


기도서와 탈무드를 압수·파괴하라.

"거짓말의 원천"이니 불태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랍비들의 설교를 금지하고 위반 시 사형하라.

"독을 퍼뜨리는 자"이니 죽음이 마땅하다고 썼다.


유대인 여행을 막아라.

"독을 퍼뜨릴 수 있으니" 이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재산을 몰수하라.

유대인들의 부는 "기독교인에게서 훔친 것"이니 몰수해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을 강제 노동시키거나 영원히 추방하라.

젊은 유대인들은 "땅을 파고, 나무를 베고, 길을 청소하라"고 했다. 아니면 완전히 쫓아내라.





이 제안들은 루터의 '악마론'과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유대인들을 "악마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 책 전체를 관통했다.


루터의 다른 말년 작품들인‘유대인의 성명과 혈통에 대하여’나 ‘유대인들에 대한 마지막 경고’ 들에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


이는 개인적인 분노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루터의 영향력은 이 글들을 독일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게 했고, 반유대주의는 그 땅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 글들은 훗날 나치의 손에 악용되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루터를 "위대한 개혁자"로 치켜세웠다.


나치 선전부는 루터를 "민족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반유대주의를 "나치 투쟁의 선구"로 규정했다.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를 파괴한 그 밤)이후, 루터란 주교 마틴 자세는 루터의 책 발췌본을 배포하며 "루터의 생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그의 유산"이라고 찬양했다.


나치 신문 ‘Der Stürmer’ 편집장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루터가 살아 있다면 나와 함께 피고석에 앉았을 것"이라고 변론하며 루터의 글을 인용했다.


루터의 종교적 혐오가 나치의 인종적 학살(홀로코스트, 600만 유대인의 희생)의 사상적 토양이 된 것이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이었고 나치는 '인종적'이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 연결선은 지워지지 않는다.


루터의 펜이 부른 피가, 수백 년이 지나서도 계속 흘렀다.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휴의 고요한 밤이 깊어갔다.


프랑켄하우젠의 피 흘리는 언덕과 시나고그가 불타는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루터는 구원을 받았을까?


그의 '탑의 체험'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의"는 은혜로 주어지는 의라고 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 교리가, 농민 10만 명의 비명과 유대인들을 향해 퍼부은 증오의 글자들을 덮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기독교의 가장 깊은 뿌리, 예수님이 직접 주신 계명.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35)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의 계명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지표라면, 왜 신학적으로도 위상이 높고 성경을 평생 파고든 루터 같은 사람조차,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 '사랑'을 거의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일까.





루터에게 사랑이 중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통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고 믿었고, 그 사랑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임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 사랑은 주로 '수직적'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이었다.


이웃, 적대자, 약자를 향한 '수평적' 사랑은 그의 신학에서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권위 복종을 강조하며 세속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보았고, 그 질서가 흔들리면 사랑보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공의 평화'를 먼저 내세웠다.


농민전쟁 때는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죄"라는 판단이 앞섰고,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악마의 자식"이라는 확신이 사랑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루터의 사고는 '진리 우선'이었다.


진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사랑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것은 루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반복되어온 딜레마다.





사랑의 계명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의 해석 속에서 '조건적'으로 변질되곤 했다.


이단 심판, 종교전쟁, 식민지 시대의 선교.


많은 경우 '하나님의 영광'이나 '진리 수호'라는 이름 아래 사랑은 잠시 접혔다.


루터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는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실천할 때 '순서'를 정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 → 교회와 사회의 질서 → 그다음에 이웃 사랑이었다.


그 순서가 뒤바뀌면 혼란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십자가에서조차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적대자까지 품는 사랑이었다.


루터의 삶을 돌아보면, 그 사랑이 그의 결정들 속에서 얼마나 희미하게 반영되었는지 아프게 느껴진다.





어쩌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너무 단단히 붙잡은 나머지, 그 믿음이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부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야고보서의 경고가 그의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





인간의 판단으로는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포 소리, 도망치는 농민들의 비명, 피의 골짜기와 같은 학살의 세부와 체계적인 제거 계획을 마주할 때, 루터의 유산은 단순한 '개혁자'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의 펜이 부른 피가 너무 많아서, 그의 빛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길고 짙다.


그 불편함이 나를 계속 묻게 만든다.


과연 그런 어둠 속에서도 은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조차 "서로 사랑하라"는 그 한 마디가 더 크게 울려 퍼져야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진정한 구원을 향한 길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책을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