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사라진 표식, 걷던 길를 되짚다

(여정 : 론세스바예스–주비리)

by 인생클래스

밤 2시.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 이삼십 킬로미터를 걷는 생활이 벌써 나흘째.

저녁 8시면 곯아떨어지고, 새벽 2시면 다시 눈이 떠진다.

긴장해서일까.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시간대 탓일까.


오픈형 기숙사 숙소.


낮에는 서로 이름도 모르던 순례자들이

한 공간에 묵는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조심스레 침낭 속으로 다시 몸을 말아 넣는다.


이불을 고쳐 덮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마음이 먼저 깨어 있었다.


겨울 스페인의 새벽 공기가 궁금해졌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별이 흐드러졌고,

달빛은 사방을 은빛으로 감쌌다.


어제와 달리 오늘 밤은

바람도, 구름도 없다.


‘어제 이랬다면,

피레네산맥도 무사히 넘을 수 있었을까.’

프랑스 알베르게 주인 할머니가

목을 그으며 내게 보였던 그 제스처.

그때 그 강경한 눈빛이 문득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고맙고 따뜻한 기억이다.

아침 7시.

숙소 안 순례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침낭을 걷고,

배낭을 정리하고,

말없이 길을 나선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걸어야 하기에.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길을 잘못 들었다.


전통 ‘까미노’와 자동차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노란 화살표를 놓친 줄도 모르고, 한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스페인 할머니 한 분이 내게 손짓을 해주셨다.

“그쪽 아니에요, 이리 오세요.”
스페인어는 못 알아듣지만,

손짓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자,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Buen Camino'로 응원을 보낸디.
그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오늘은 그 말처럼

좋은 순례길이 될 것 같았다.


길을 걷다 보면, 상념에 젖는다.


앞사람도 없고,

뒤따라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

문득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감각을 잃는다.
표식을 놓치고 방향을 틀면,
길을 잃는 건 순식간이다.


야고보 성인이

처음 이 길을 만들었을 때도,
이렇게 길을 헤매다

새 길을 만들었을까.


돌아보면, 내 삶도 그랬다.


원하던 길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가 만들어낸 방향.


그래서 지금, 이 길 위에 내가 있다.


걷다 보면 풍경이 바뀐다.


초지대를 지나고,

송백과 자작나무가 이어지는 숲이 나온다.

마침내 오늘의 도착지 '주비리(Zubiri)'가 보인다. 마을 입구의 'Rabia 다리'를 건너면 도착이다.

그런데 공용 알베르게는 모두 닫혀 있었다.
한 겨울이라 걷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란다.


근처의 사설 알베르게를 찾았다.


하룻밤 15유로.

어제 공용 숙소보다 훨씬 따뜻하고 깔끔하다.
이 정도면 호텔급 이다.


뒤늦게 도착한 아일랜드 친구가 보인다.


어제도 만났던,

요리사 출신의 청년이다.

그와 함께 머물기로 했다.

그 친구가 직접 만든 파스타와 맥주 한 잔.
눈 내린 숲을 걸은 하루의 끝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돌아보면,
오늘 하루에도 작은 길 잃음이 있었고,
뜻밖의 만남이 있었고,
따뜻한 저녁 한 끼가 있었다.


혼자 걷는 길이라 생각했지만,
혼자만의 길은 아니었다.


때론 누군가의 손짓이 길이 되고,
누군가의 한 끼가 위로가 된다.


오늘도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시 사람을 믿는 법을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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