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첫날, 진짜 두려웠던 건 '위험'이 아니라 '고립'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전,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이름이 있다.
바로 피레네 산맥.
안내서마다 말한다.
이 산맥을 넘어야 비로소 ‘진짜 순례길’이 시작된다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겨울의 피레네 산맥은 다르다.
그날의 동행자,
그리고 무엇보다 날씨의 허락이 있어야만 넘을 수 있다.
생장에 도착한 저녁.
숙소 주인 할머니에게 “내일 새벽, 혼자 산맥을 넘겠다”라고 하자
그녀는 목을 그으며
'절대 안 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해봤지만, 할머니는 단호했다.
결국 근처 크레덴셜 발급소 직원까지 불러 나를 말렸다.
최근 눈보라 속 사고까지 언급하며,
두 사람은 간절하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혼자 피레네를 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내 마음속엔 의욕이 넘쳤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걷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애정 어린 충고,
그리고
'이곳을 찾는 한국인 2,500여 명 중
누군가 사고를 당하면 뉴스에 오를 수도 있다'는 말에
첫날부터 '어글리 코리안'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결국 그들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진눈깨비 내리는 날씨 속에 나는 피레네산맥 우회도로를 따라나섰다.
이 길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정돈되지 않은 산길,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고지를 돌고 돌아
눈비를 맞으며 걷는 길.
점심 무렵부터는 젖은 옷에 찬바람이 불어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우회길이라지만,
첫날부터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두려웠던 건
아무도 없는 길.
눈과 비가 뒤섞인 그 산길 위에
나 혼자라는 사실이
위험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다.
위험이 아닌 고립.
그것이 나를 더 움츠리게 했다.
혹시라도 이 우회로를 이용하게 된다면,
충분한 간식과 음료,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꼭 필요하리라.
산길 어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청년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25살.
짧은 동행이었지만
그는 스페인과 산티아고 길의 역사,
문화, 건축 양식까지 줄줄이 설명해 주었다.
사전 준비 덕분인지,
아니면 같은 유럽 문화권이라 더 익숙한 것인지,
그의 해박함이 부럽기만 했다.
여행의 짐보다,
여행의 의미를 준비해 온 사람.
나는 배낭 무게만 걱정했는데,
그는 이 길의 맥락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준비의 방식이 다르면,
여행의 깊이도 달라지는 것일까.
사람 사는 곳이니
조금 부족해도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나처럼 출발 직전까지 물품만 챙기기보다,
그처럼 문화와 철학을 곱씹으며 여행을 준비했다면
조금은 덜 외로웠을까?
해가 저물고,
숙소(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느낌이었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도
언덕을 넘어오며 느낀 추위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떠나온 이 길,
첫날부터 몸과 마음이 모두 버거웠다.
특히
산맥을 넘으며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던 고독이
내게 얼마나 낯설고 무거운 감정이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침낭 속.
익숙한 사람 하나 없는 이국의 밤.
깊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나는 출발 전 외워두었던 세 마디를 되뇐다.
Buen Camino.
Hola.
Gracias.
오늘은,
그마저도 나눌 사람조차 없었던 하루였다
[4화] 사라진 표식, 걷던 길을 되짚다
작은 흔들림 속에서, 다시 중심을 잡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