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공항, 낯익은 마음
심야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을 날아 도착한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처음 와보는 나라,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하다.
아마도 내 마음은
이미 이곳을 향해
오래전부터 걷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순례의 출발지인
작은 도시 생장으로 가기 위해
나는 TGV를 기다린다.
프랑스는 기차 플랫폼이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단다.
전광판에 기차출발 10분 전에야 표시된다는 말에
잠시 불안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상형문자 같은 기호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 순간 떠오른다.
'언어는 달라도, 길은 사람을 위한 것'
우리 조상들이 남긴 상형문자의 지혜처럼,
이 길도 결국은
사람의 발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된다.
기차를 기다리며 상상해 본다.
혹시 내가
잘못된 열차를 타고
엉뚱한 도시로 몇 시간을 간 뒤
뒤늦게 알게 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지만,
그런 실수를 하기엔
나는 너무도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그게 어쩌면 슬픈 이야기다.
늘 정답만을 선택해온 삶.
그것이 내 인생을 더 좁고 외롭게 만들었는지도.
기차 안에서
가족이 건넨 손편지를 꺼내본다.
한 글자, 한 문장마다
걱정과 사랑이 묻어난다.
'미안해… 끝까지 버티지 못했어.'
위로가 되어야 할 존재가
오히려 걱정거리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온다.
편지 속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패자는 과거에 살고,
승자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향해 걷는다."
바욘에 도착한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미지의 여정을 앞둔 설렘,
그리고 불안 때문이었을까.
새벽녘, 창밖엔
잔잔한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의 도시 위로
물안개처럼 내리는 프랑스의 새벽.
그 낯설고 고요한 빛이
마치 내 마음을 위로하듯 퍼진다.
이튿날,
나는 비아리츠 해변으로 향했다.
잔잔한 바람조차 없는 새벽,
그곳의 파도는
미친 듯이 바위를 때리고 있었다.
내 안의 울분, 억울함, 분노,
그 모든 감정이
그 파도에 실려
부서지고 떠나가는 것 같았다.
11시쯤,
생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 풍경은
그저 평범한 시골마을일지 몰라도
내게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한 시간 후면
순례길의 첫 발을 디딜 것이다.
이 길의 시작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본다.
"이번 여정은
많이 힘들고, 철저히 외롭고 싶다."
용서하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면,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만은
이 길이 내게 가르쳐 주기를.
그렇게 나는, 걸음을 떼었다.
과거가 묻어나는 발자국 위에
새로운 내일을 걷기 위해.
[3화] 0km, 피레네를 넘지 못한 날 나를 넘다
처음으로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고, 걷기 전의 그 고요하고도 낯선 생장에서의 밤. 누군가에게서의 이별보다, 자기 자신과의 이별이 더 어려웠던 그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