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멈춘 날,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면, 나는 다시 그 길을 떠올린다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10년 전, 갑작스레 떠났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난다.
핸드폰을 꺼놓고 33일간 눈뜨면 걷고,
숙소에 도착하면 그대로 잠들던 그 단순한 날들이
지금은 오히려 ‘행복’으로 남아 있다.
사실 나는 이 길을 준비하지 않았다.
계획도, 장비도, 명확한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해 겨울,
나를 지켜야 했지만 지켜내지 못한 싸움 끝에
지쳐버린 내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해고 통보.
그리고 진실보다 오해가 앞서는 조직의 의도적 냉담함.
더 단단히 맞설 수도 있었고,
더 명확히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도와주던 몇몇 동료들에게까지 불이익이 갈까 봐
결국 조용히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무너졌다.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며칠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신문에서 읽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남은 삶을 지키기 위해
단 1주일 만에 스페인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걷자. 그래야 살 수 있다.”
그 길은 회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결심이었다.
혹독한 추위도 만났고,
마음 따뜻한 스페인 중년의 친구도 만났다.
젊은 외국 친구들과 세대 차를 잊고 웃기도 했다.
도착지마다 마주한 작은 카페에서는
맥주를 마시며 노년을 즐기던 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 떠난 길이었다.
그래서 혼자 800킬로미터를 걷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 길에서도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야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배우고 말았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다시 그때처럼 20킬로 배낭을 메고
길 위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살기 위해 떠났다.
2015년 1월 9일.
목적지는 스페인 산티아고,
첫 기착지는 프랑스 바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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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욘, 첫 고요에 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