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5km 앞에서 숨을 고르며 배운 것들.
숨을 고르는 거리
내일 코스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조절한다.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불과 5km를 남겨둔 지점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의미 있게 성당에 도착할 생각이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한 번 더 숨을 고르는 구간,
이 길은 종착을 앞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에 가깝다.
아직 해보지 않은 것
30여 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왔다.
그렇게 습관처럼 걷는 동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이 길에서 무엇을 아직 해보지 않았을까.
의외로 간단했다.
가장 늦게 일어나
모두가 떠난 뒤
여유롭게 출발해 걷는 일.
나는 하루도 그렇게 걸어본 적이 없었다.
성실함이라는 습관
부지런함과 성실함만이 삶의 미덕이라 배워왔다.
그래서 지난 30일 동안
늘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먼저 출발하고
빨리 걷고
여유 있게 도착했다.
오늘은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눈은 일찍 떠졌지만
의도적으로 오전 9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알베르게(숙소) 2층 침대 위에서 전해지는 짐 싸는 소리,
침대가 흔들리는 감각마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모두가 떠나고 아무도 없는 알베르게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 샤워를 했다.
욕실에는 누군가 남겨둔 얼마 쓰지 않은 샴푸와 린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샴푸와 린스로 머리를 감는다.
아마도 그 사람은 성 야고보를 만나러 가며
뒤에 올 순례자를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을 것이다.
오늘 늦게 출발한 나에게는
뜻밖의 축복 같은 순간이다.
비 오는 아침의 솔로 커피
열 시쯤 숙소를 나와 카페에 들렀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침에 즐겨 마신다는
에스프레소에 위스키 몇 방울을 떨어뜨린
'솔로(Solo)' 커피를 주문했다.
비 오는 날 아침이 면나는 늘 이 커피를 마셔왔다.
카페 앞 길거리 의자에 혼자 앉아 무심코 흥얼거린다.
"굿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 대목만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된다.
아마도 그건
한국에 두고 온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피하지 않을 시간
진한 모닝커피를 마시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신적 아픔을
육체적 고통으로 잊으려 했던 의도적 혹사는 아니었을까.
강하게 부정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걸어왔다.
이제는 답을 해야 할 시간이다.
쓰러졌던 시간들
지난해,
15년 동안 애정을 쏟았던 은행으로부터
내 삶의 정체성을 부정당했다.
가족이라 믿었던 동료들의 변신, 돈 앞에선 옳고 그름조차 흐려지는 대형 로펌의 공격.
무엇보다 아팠던 건,
나를 돕다 큰 불이익을 감수한 소수의 동료들이었다.
내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할 수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쓰러졌다.
그 시퍼런 멍 자국은
아마 평생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봄바람이 스칠 때
1월 초에 출발해 2월에 접어드니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봄의 기척이 실려 온다.
남겨진 샴푸와 린스로 정돈한 머리칼이 봄바람에 흩날린다.
오늘은 의도적으로 느리게 걷는다.
그림자와의 대화
함께 걷는 것은
내 그림자뿐이다.
그림자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며 지난 30일간 길 위에서 느낀 행복이 앞으로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마지막 전의 숲길
오늘의 길은
조용하고 평온한 숲길이다.
목초지와 오래된 나무숲이 마음을 씻어내듯 이어진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마음을 정화하라고 준비한 구간 같다.
가장 늦게 출발했기에 혼자 걷는 행복을 마음껏 누린다.
끝이 아니라 시작
산티아고를 한 구간 남겨둔 지금,
문득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592km 표지석에 적혀 있던 말.
"산티아고는 끝이 아니다.
단지 시작일 뿐이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매달리기보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살자.
무엇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감사의 자리
지난 30일은
오래도록 미뤄왔던
삶의 과제를 하나 풀어낸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야
혼자 걸을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내게도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음화.
제2부 32화- 별빛이 먼저 닿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