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용서의 언덕, 그리고 젊은이들 앞에서의 침묵

용서의 언덕에서, 나를 내려놓다

by 인생클래스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


그것은 바로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이다.

언덕 위, 바람을 맞으며 행진하는

순례자 조형물들은 이 길을 걸은 수많은 이들에게 상징이 되어준다.

그 언덕에 다다르기 전,

걷는 이들은 ‘모든 것을 용서하라’는

묵시적 권유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그렇게 큰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저,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지 않게 해 달라고….

그 미움에 스스로 갇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뿐이다.

언덕 위에 서니 시야가 확 트인다.


눈 덮인 산을 지나오며

웅크렸던 시선이 들판 위로 쫙 펼쳐졌다.


하늘은 연한 회색이었고,

발밑으론 푸른 밀 싹들이

눈 녹은 흙 위에 움트고 있었다.


순례자 조형물은

그 언덕에 늘 그렇듯 바람에 흔들리며,

저마다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가야 할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덕을 내려와 걷다 보니,

작은 마을 Uterga 근처.
다섯째 날이었다.

뜻밖에도
한국 대학생 두 명을 만났다.


이곳까지 와서
게다가 겨울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이곳에 온
그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나는 저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 학생은
경영학을 전공한 졸업반으로,
선배와 함께 걷고 있었다.


자연스레
졸업 후 진로 이야기가 오갔다.


친구들은 대부분 창업보다는
취업을 선호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고 했다.


"좋은 아이디어로
기술력을 확보해도

6개월 이내 대기업에서 침범해
더는 기술을 지킬 수 없어요."


"법적으로 대응해도
대기업의 자금력을 동원한

대형 법률 사무소와의 싸움에서

무너집니다."


그 말은
마치 얼마전 내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마케팅 부서도 아니었고,
접대비를 자주 쓰던 부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접대비 관리와 은행 차량 사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했다.


임원이 되고 난 후 회사에서
배정된 차량을 이용했고,
모든 사용이 사전 정당한 승인 하에 이뤄졌지만

감사 시점에 계약서가 없었다는 이유로
나는 낙인찍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임원 자리에서
순식간에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회사는 자금력을 동원

대형 법률사무소를 앞세웠고
홀로 힘겨운 싸움에서 동료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눈빛만으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은 다물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증언 하겠다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마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혼자 내려놓았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그날,
대학생들과 함께
작은 마을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그들과 나눈 대화는
생각보다 깊었다.


나는 함께 걸어오며
"법조인은 좋은 직업이 아니야."

의뢰인을 위해서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기술자들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곧 연수원에 입교할 예정이라 했다.


순간,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말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나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는 그 법조계에서,
다르게 살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미안했다.


그 미안함은
내 몫이었다.


카페를 나와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젯밤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던
아일랜드 청년을 다시 만난다.


"어제 내 옆에서 잤는데,
코 고는 소리는 안 들었지?"

내가 웃으며 묻자
그는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쪽 코 고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대신 평생 들어본 적 없는 트럭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긴 했죠."


우린 함께
한참을 웃었다.


공용 숙소의 불편함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너그러운 농담 하나에
그 부끄러움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도 오늘
용서의 언덕을 넘었을 테니,

나 역시…
어쩌면 용서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길은
다정했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
라라소나를 향해 걷는 길.


그곳엔
아침 서리꽃이 덮인 들판,
낮게 늘어진 포플러와 떡갈나무 숲,
덩굴이 터널처럼 이어진
오솔길이 펼쳐져 있었다.

하얗게 언 강 위엔
까치 몇 마리가 멈춰 있었고,

내 발자국 소리만이
길 위에 새겨졌다.


무거웠던 마음을 걷고,
말하지 못한 미안함도 걷고,

나는 그저
또 하루의 길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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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포도밭 언덕과 새벽의 자문(自問)

"그렇게 미안함을 내려놓은 어느 날, 나는 포도밭 언덕 위에서 새벽의 자문(自問)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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