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안고 걷는 사람의 하루(레이나(Reina) 에스테야(Estella)
지난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까지
삶은 쉼 없이 나를 흔들었다.
폭풍 같았던 시간은 새해를 며칠 앞두고서야
겨우 멈춰섰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그리고 축 처진 기운 속에서
가족들조차 나를 곁에 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떠나자. 어제든 어디든, 그곳으로.'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 하나만으로 30년 일군 삶을 내려놓고
산티아고 길에 오를 용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뜻밖에 던져진 충격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이 모든 게, 축복이었다는 걸.
오늘 걷는 길은 레이나(Reina)에서 에스테야(Estella)까지.
유독 평화로운 길이었다.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내리며
황량한 겨울 들판과 자그마한 마을을 지난다.
바람은 차가웠고,
포도밭은 마른 줄기만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여름의 기운이 숨어 있었다.
시간을 품은 땅.
길가엔 앙상한 산딸기 덤불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 작은 들꽃들이
겨울 햇살 속에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도시로 들어서는 길목,
오래된 성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그 섬세한 조각과 부드러운 곡선 앞에서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래서 사람들이
유럽의 작은 도시들을 사랑하는 걸까.
도시는 조용했고,
구름은 느리게 흘렀다.
나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얼마나 오래, 하늘을 보지 않았던가.'
가슴 안이 조용히 일렁인다.
숙소에 도착하니
소박한 파티가 열렸다.
이탈리아에서 온 알프레도는
직접 만든 와인과 파스타를 꺼냈고,
미국에서 온 케티는
내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나도 한국 음식을 한번 대접하고 싶었지만
막상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치찌개나 삼계탕 정도는 배워둘걸…'
모처럼의 따뜻한 저녁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일상’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모두가 웃으며 파스타를 나누는 사이
나는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 걸까.”
“지금이 내 삶의 가장 큰 시련기일까.”
“그동안 내가 지켜온 정직과 성실, 근면은
정말 나를 지켜주었을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알베르게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그 안에는 아직도 분노와 슬픔,
그리고 미련이 남아 있었다.
새벽,
숙소의 어둠 속에서 눈이 떠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 번, 과거의 기억에 몸을 떨었다.
해고 통보.
한국 최대 로펌과의 싸움.
침묵으로 일관하던 동료들.
그리고 내가 지켜왔던 모든 가치들에 대한 배신.
그 기억은
가슴 속에 깊이 박힌 못처럼
여전히 나를 찌른다.
이 상처에서 나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아직 멀쩡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침 햇살이 길을 비추고
에스테야로 향하는 길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포도밭 언덕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돌담에 기대 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잠시 인간다워졌다.
나는 지금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길의 끝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하루,
아무 말 없이 걷고,
조금 웃고,
조금 먹고,
조금 나눈 이 하루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면, 됐다.
다음화
[8화] 와인 한 모금, 그리고 아버지의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