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와인 한 모금, 그리고 아버지의 언덕

로그로스, 걷는 자에게 말 없이 건네는 위로

by 인생클래스

늦은 아침, 에스텔라의 고요


에스텔라의 아침은 유난히 늦게 시작된다.


모두가 떠난 텅 빈 알베르게에서,

나 혼자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왔다.


마을 중심을 흐르는 강가 카페에 자리를 잡고,

모닝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커피 향에 섞여 오는 건, 갓 구운 바게트의 고소한 냄새.

커피를 마시는 사이,
현지 직장인들이 바게트 하나씩을 손에 들고
카페를 빠져나간다.


그들의 간단한 아침 식사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한국 여성들처럼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 않아도 되는 이 문화는
스페인 여성들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까.'

전설은 진짜였다 –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 분수


에스텔라를 떠나 6km쯤,

부드러운 오르막을 지나자 돌담 너머 수도원의 첨탑이 보였다.


전설로만 들었던,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 분수다.

광고성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정말로 수도원 담장에

작은 꼭지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깊은 붉은빛의 포도주가 흘러나왔다.


잔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남는 부드러운 단맛보다,

순례자에게 이토록 너그럽게

내어놓은 마음이 더 깊이 와 닿았다.


진심이 담긴 환대는 마신 술보다 오래 남는다.


쉬운 길 대신, 고독한 구길


수도원을 지나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새로 닦인 평탄한 도로,

다른 하나는 산자락을 따라가는 험한 구길.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구길을 택했다.

이 길에 온 이유가

철저히 혼자이고, 철저히 고독하기 위해서였다면,

쉬운 길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진눈깨비 속의 고요


산자락을 따라 굽이진 오솔길.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을
3킬로 넘게 걸었다.


그러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세찬 바람과 진눈깨비가 몰아쳤다.
길은 갑자기 무겁고, 고단해졌다.

그런데 마음 한켠은 오히려 가벼웠다.


'일주일 만에 스페인의 사계절을 다 겪었구나.'
조금의 불편함도
지금 이 여정의 일부라 생각하니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기억의 리듬, 시골의 언덕


로그로스로 향하는 길.
드넓은 들판 위로
18킬로의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고요는 고요로 되돌아오고,
걸음은 묵묵히 리듬을 만든다.

문득 떠올랐다.
어린 시절, 시골의 신작로를 걷던 기억.


멀리 길 끝이 보여 도착했다 싶으면,
언제나 그 너머엔 또 다른 언덕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리듬, 똑같은 인내.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시 주문했다.


'무언가를 얻겠다는 의무감보다,
오늘 하루를 잘 걸었다는 기쁨이면 충분하다.'

로그로스, 조용한 환대


마지막 언덕을 넘어
세 번쯤 기대했던 마을의 실루엣이
네 번째 언덕 끝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이 바로, 로그로스(Los Arcos).

붉은 지붕 아래,
보수 한 번 없이 그대로인 돌담 집들이
마치 서로를 바라보듯 서 있다.


긴 길을 걸어온 이를
말 없이 조용히 맞이하는 모습이다.


마을 중앙의 원형 광장에는
의외로 큰 성당이 있고,
그 곁 작은 바에선
어르신들이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눈다.


한가롭고, 오래된 시간의 흔적.
왠지 낯설지 않다.


어릴 적 시골 구판장,
정자나무 아래 막걸리와 바둑, 장기 두시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풍경이
이국의 거리 위로 겹쳐졌다.

그리움의 언덕


긴 걷기의 끝.
늘 마지막 2~3킬로는 가장 버겁다.


그럴 때마다
17년 전 떠나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분은 평생 지게를 지고 농사만 하셨다.
내가 등에 멘 배낭보다
몇 배는 무거운 짐을
언제나 당연하듯 지고 언덕을 넘으셨다.


어느 여름날,
그 지게를 내려두고 땀을 닦던 아버지의 독백이 떠오른다.


쉼 없이 일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리도 삶이 고단한가…”


그땐 몰랐다.

이제야 그 말씀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그분이 오르던 언덕,
그분이 걸었던 삶.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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