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비아나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저 작은 새들조차
결국 자기 날개로만 날 수 있기에,
우리 역시 스스로의 날개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아마도 이 길을 걷는 많은 젊은이들도
훗날 ‘홀로 나는 법’을 익히기 위해
이 순례길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온 대학생 두 명, 그리고 대학원생 한 명을 길 위에서 만났다.
그들은 이 길을 걷기 위해 부모님의 지원과 허락을 받았겠지만,
이내 걸음걸이와 말투에서 느껴진다.
이들에겐 이미 혼자 헤쳐 나갈 충분한 힘이 있다.
건실하고 따뜻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을 떠올리며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스친다.
경험조차도 부익부 빈익빈.
방학 중 경험을 원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
하루하루를 아르바이트로 메우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게도 언젠가 이 길 위에서의 여유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나는, 살아가며
옳은 일이라면 소수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이른 아침엔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출발할 즈음엔 화창한 햇살로 바뀌었다.
토레스에서 비아나까지는 약 20km 남짓,
보통 5~6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처음 5km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올리브나무와 포도밭,
아직 이른 시간이라 포도 잎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오면,
작은 언덕 위 팔각형 종탑이 실루엣처럼 떠오른다.
두 번째 언덕에 오르기 전,
작은 농가 옆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농부가 지나가며 “Buen Camino(좋은 길을)”라 인사를 건넨다.
그 한마디에 피곤이 스르르 풀린다.
언덕 정상에선 돌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순례자들이 소원과 기도를 담아 올려놓은 작은 바위들.
부모의 건강을 기도하는 글귀,
자식의 안녕을 바라는 메모.
그리고 ‘우리 가족, 건강히 4년 후 꼭 함께 오길’이라는
작은 한글 쪽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종이 쪽지는
4개월 전의 비, 눈보라를 견디며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비닐로 감싸고 돌로 눌러 놓은 정성이
그 바람을 오래 머물게 하고 있었다.
그 글을 보며
나 역시 가족을 떠올렸다.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
특히 아내에게.
아내도 지난 4개월 동안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홀로 서 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
단, 걷는 이의 땀 한 방울이 만든
맥주 한 잔의 기쁨을 아는 그때에야.
물론 술만 보면 잔소리부터 쏟아내는 그녀가
30일간 함께 걷는다면
나는 아마 도중에 ‘코너에서 다운’될지도 모르지만.
비아나에 도착하기 전,
길은 포도밭 사이를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내리막으로 변한다.
멀리서 보이는 붉은 기와 지붕들이
하나둘 모여 ‘이제 도착이구나’ 하는 안도감을 준다.
비아나는 중세 시대부터 와인 무역으로 번성했던 마을이다.
마을 입구엔 웅장한 성당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좁은 골목길엔 작은 바와 빵집이 이어져
순례자들이 한숨 돌릴 수 있다.
함께 걸었던 친구들과
두 밤을 같이 보낸 덕분일까.
아쉬움이 커 이른 시간이지만
비아나(Viana)에 머물기로 했다.
알베르게는 오후 3시 반에 문을 연다 했지만
관리인은 4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스페인은 낮잠의 나라다."
오후 2시부터 4시는 시에스타.
심지어 개조차 짖지 않고 잠든다.
아무리 눈보라를 뚫고 도착했어도
그 시간에 알베르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불평 없이 기다릴 준비를 하고 도착하라.
이 길 위에서 배운다.
기다림의 미덕,
배려의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날개로 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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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짧은거리, 깊은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