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조용한 순례길(비아나 → 로그로뇨)
겨울 순례길은 참으로 조용하다.
아침에 각자 출발하더라도,
저녁이면 우리는 같은 알베르게에 다시 모인다.
겨울엔 문을 여는 숙소가 많지 않기에, 20~30킬로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숙소로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모인다.
어젯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커플, Denyse의 생일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 날이 그녀의 생일. 그 기념일을 순례길에서 의미 있게 보내고 그 후, 개인 사정으로 귀국할 예정이란다.
그들의 사연을 들으며 이 길을 몇 해에 나눠 걷는 유럽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해마다 시간을 내어, 자신이 지난번 걸었단 그 길의 끄트머리부터 다시 걷는 여유.
우리는 큰 결심 없이는 이 먼 곳까지 오는 것조차 어려운데.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예정된 20~30킬로가 아닌 단 10킬로 남짓한 로그로뇨(Logroño)까지만 걷기로 했다.
지금껏 각국 안내서가 정한 하루 코스를 그대로 따르던 이들도 이 날만큼은 책자에서 벗어나 '함께 머무는 의미'를 택한 것이다.
오전 10시쯤 비아나를 느긋하게 떠났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짧은 여정이 아쉬울 만큼 걷는 길은 참으로 평탄했고, 포도밭은 마치 붉은 물결처럼
길 양옆으로 넓게 펼쳐졌다.
도심 입구에 다다르기 전, 1.5킬로미터의 소나무 숲길이 느리게 걷게 만든다.
아무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의 길.
소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중세도시의 윤곽이
마치 다른 시간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설렘을 안겨준다.
도심 입구엔 걷는 이들에게 평생 무화과와 물을 나누어주었다는 한 할머니를 기리는 집과 작은 기념 팻말이 있다.
그 따뜻한 마음은 이제 그녀의 딸에게로 이어졌고, 그녀 역시 어머니처럼
걷는 이들을 위해 같은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이런 세대를 넘는 배려는
한 잔의 물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에브로(Ebro) 강 위 12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 도심에 들어서면 로그로뇨의 시간이 펼쳐진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시가는
예스러운 골목길마다 소박한 음식점들과
백 년의 시간을 담은 레스토랑,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거리의 악사까지 모두 제자리에서 제 빛을 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모데르노(Moderno) 레스토랑의 종업원은 단연 인상 깊다.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손님에게 농담을 건네는 유쾌한 인물.
"한국 음식 그리우시죠? 여긴 뭐든 다 됩니다.
단, 내일부터요."
아마 내일 다시 가도 그는 똑같이 말하겠지.
"내일부터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죠?"
이렇게 허허 웃게 되는 사람. 그도 이 도시에, 이 길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광장을 걷다 보니 구석진 곳에 조용히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악사가 있다.
모자 하나 펼쳐놓고, 겨울 허공을 가르는 그 선율. 이 도시의 겨울은 그렇게 울컥하게 만든다.
오후 2시. 텅 비었던 광장이 벼룩시장으로 가득 찬다.
사람들은 바삐 무언가를 고르고, 교환하고, 웃고, 흥정한다.
사고 싶은 물건 몇 개 있었지만, 배낭의 무게가 나를 말린다.
오늘도, 내일도, 이 배낭은 내 인생의 짐처럼 등에 달려 있으니까.
성당 광장을 낀 중심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포도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구나.
붉은 얼굴로, 배낭을 옆에 두고 낮술을 즐기고 있는 이 낯선 이방인을 말이다.
오늘은 짧은 거리만 걷고 도착한 하루.
마치 숙제를 안 하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그냥 넘어가준 날처럼
기분 좋은 안도감이 밀려온다.
이제 나는, 그 시절 그런 너그러움을 보여주시던
담임 선생님처럼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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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