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 Najera
날씨가 시시각각 바뀌는 날은,
사람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비가 내리다, 눈이 되고,
눈이 그치자 햇살이 비친다.
그렇게 30분마다 마음도 바뀌는 날.
오늘 이 길 걸으며 처음 호수를 만났다.
오리 떼가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흐른다.
"아, 평화롭다."
이 길에선 자주 그런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오랜 걷기 끝에 내 작은 발가락이 나를 배신한다.
물집은 부풀고, 통증은 발등까지 번졌다.
발가락 하나 때문에 온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무릎과 넓적다리 관절까지 덩달아 아프다.
드디어 가져온 바늘과 소독약을 꺼낼 때가 왔다.
도로변에 앉아 조심스럽게 바늘을 들고,
발가락 물집을 터트리기 위해 준비하는데
함께 걷던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괜찮아. 난 좀 더 쉴게."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했다.
조금 나아지자 다시 걷는다.
눈비를 지나 햇살 아래
갑자기 철조망 위 십자가들이 보인다.
나무 파편들로 만든 십자가.
제재소에서 나온 자투리로
이정표 없는 길 위의 기적의 상징을 세워놓은 것.
누군가에겐 그 십자가가 희망이고,
누군가에겐 소원이고, 기도다.
하지만 햇살이 너무 따뜻해 잠시 여유롭게 걸었나 보다. 앞서가던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 시간 넘게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걷는 길, 말 그대로 혼자다.
눈앞에 사람도 없고, 물어볼 현지인도 없고,
다음 도시가 어딘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20km쯤 떨어졌다는 벤토사라는 마을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그곳엔 숙소도, 사람도 없다.
오후 4시 10분, 겨울
이제 해는 금세 지고,
다음 도시 나헤라(Nájera)까지는 12km 나 남아 있다.
배낭을 고쳐 메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혼자, 어둠이 오기 전까지 걷고 또 걸었고,
도시의 윤곽이 저 멀리 나타났을 때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건 희망의 착시였다.
도시는 보여도 걸음은 3시간 더 이어졌다.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해도, 끝난 게 아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나헤라 입구,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바에 들어가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도착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
하지만 다 온 게 아니다.
바에서 숙소까지는 또다시 2km나 남았다.
겨울 저녁, 맥주와 와인,
그 모든 위로가
지친 다리엔 또 다른 고문이었다.
아내 말이 맞다.
"당신은 술만 보면 코부터 벌름거린다니까."
오늘은 그 말이 웃기지 않고
그냥 사실처럼 느껴진다.
힘들게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그 숙소에는,
어제 함께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완전히 새로운 그룹.
고립감.
낯선 얼굴들 사이의 어색함.
이럴 땐 뭔가라도 해야 했다.
얼마 전 외국인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받았던 기억이 나서
"삼계탕을 끓여보자!."
닭 한 마리, 찹쌀, 마늘...
열정은 가득했지만
밤새 끓인 삼계탕은 완전 실패.
고기도, 밥도 다 설익었다.
그 와중에
"이 닭은 주인 허락도 없이
밤새 등에 문신을 새기고 나타난 느낌이다."
하필이면
다음 도착지가
'닭의 기적' 전설이 있는 도시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내 삼계탕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어떤 기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걷는 건 참 그렇다.
하루가 너무 힘들면,
다음 날이 궁금해진다.
다음화
13화. 진흙길 위에서 만난 믿음의 도시-산토 도밍고(Santo Domi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