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아침, 조용한 이별

부르고스

by 인생클래스

하얀 길 위를 걷다

눈 덮인 길을 걸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듯한 언덕,
굽은 담장 위에도 눈이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따금 마주치는 작은 마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그곳에 아직 '삶'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바삭거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나의 동행이었다.


에르제니오, 조용한 이방인

오늘은 숙소에서 처음 만난 한 사람과 하루를 함께했다.

그의 이름은 에르제니오,
마흔 즈음되어 보이는 스페인 남자였다.


그는 말수가 적고 표정도 어두웠다.
다른 순례자들과 달리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속 깊은 사연이 있는 듯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바에 가서 한 잔 어때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술 마시는 시늉에 "비노 띤또?" 하며 웃었다.

그 미소가 참 따뜻했다.

포도주든 맥주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에게 따뜻한 와인 한 잔을 건네고 싶었다.


완벽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다

숙소 옆 작은 바에서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두 잔쯤 마신 뒤,
그는 서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어, 나는 영어라 완벽한 이해는 어려웠다.


말이 통하지 않자, 그는 메모지를 꺼내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했다.


그림에는 한 여자와 어린아이가 있었다.
1년 전 이혼했고, 다섯 살 딸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듯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싫어져 헤어질 수는 있어도… 아이만큼은 볼 수 있기를.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녁은 내가 대접하겠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오래된 학교를 개조한 곳이었다.


그날 묵은 사람은 단 세 명.
우리는 함께 식재료를 나누어
요리를 하고, 불을 피워 식탁을 차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음식을 나누고, 와인을 기울이며,
웃음이 피어났다.


나는 여전히 설거지 담당이었다.
스페인까지 와서 주방 막내라니.
그 사실이 괜히 재미있어 웃음이 났다.


조용한 이별

아침 6시.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산티아고 길의 이별은 늘 그렇다.
하루를 함께하고, 다음 날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 인생도 결국 '만남'보다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걸까.
그래, 나도 내일은 말없이 떠나보리라.


부르고스, 천사의 도시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부르고스.
이곳은 중세 순례자들이 쉬어가던 도시이자,
스페인 3대 성당 중 하나가 있는 곳이다.


부르고스 대성당.
프랑스 고딕 양식이 짙게 스며든 그 건물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스페인 국왕은 이 성당을 두고
'사람이 아닌 천사의 솜씨'라 했다는데,
실제로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부르고스의 밤, 나만의 이름표 하나

도심은 밝고 활기찼다.
저녁 어스름, 광장 근처 빵집 앞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도 호기심에 줄을 섰다.


손에 들어온 건,
방석만 한 커다란 빵 한 덩이.


이 빵의 이름이 뭘까.
스페인어로 뭐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이 밤만큼은 부르고스에서의 내 순례 이름표로 붙여두고 싶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길에서 사람은
누군가의 위로를 기대하기보다,
자신 안의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지며
삶의 다음 장을 넘기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다음화

17화. 메세타의 밤, 별이 쏟아지던 그 길에서

이전 15화 15화-걷다가, 그리움에 멈춰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