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프랑카
15화. 걷다가, 그리움에 멈춰 서다
준비도 마음의 각오도 없이 떠나온 산티아고 순례길.
오늘도 눈 덮인 겨울 들판을 걷고, 겨우 숙소에 도착해 Wi-Fi가 되는 자리를 찾아 다음 숙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인천 자장면 맛집 사진 한 장이 밤을 지새우게 만든다.
쉽게 얻을 수 있었기에 귀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곳에선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그리움이 된다.
밤, 허술한 창으로 스며든 찬바람이 침낭을 비집고 들어오고 방금 나온 자장면 한 그릇이 간절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나를 덮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진 "백중날".
세벌김매기를 끝낸 농촌의 여름, 그 하루만큼은 쉬던 날이었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부모님은 몇십 원을 자식들 손에 쥐여주셨고 형과 나는 십여 리 떨어진 읍내 자장면 집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한 그릇을 시켜 종업원 눈치 보며 나무젓가락을 비비던 기억.
기다림조차 설레었고, 한 젓가락 한 젓가락이 세상 전부였던 그 순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장면은…
맛보다 순수한 열정과 설렘이 담긴 음식이었다.
중년이 되어 맞닥뜨린 산티아고 순례길.
"진짜 나를 찾으라"는 정보와 조언들 사이에서
정작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에 자꾸 멈춰 선다.
염색약으로 가면을 쓰듯 살아온 긴 시간.
그러다 고요한 산티아고 순례길 들판 위에서 자장면을 떠올리며 잠못 이루다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가?."
새벽녘, 눈이 무섭게 내린다.
겨울에 이길 걷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기로다.
많은 이들이 오늘은 쉬기로 했지만, 나는 영국에서 온 젊은 친구와 함께
조심스럽게 비야프랑까까지 12km를 걷는다.
하얀 벌판 위를 걷다 보니, 젖은 등산화가 놀랍도록 깨끗해진 걸 보며 괜히 웃음이 난다.
오늘 밤, 스페인 멋진 식당에 가서 탱고 음악을 들어볼까?. 그러다 스페인 여인이 탱고 춤을 신청하면… 한번 나가볼까?.
이곳에 오며 직장 생활 중 갑자기 닥친 시련을 통해 겪은 인간관계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잊어야 할 아픔을 내려놓기 위해 집을 떠났다.
하지만 텅 빈 들판을 덮은 하얀 눈은
내 마음을 다시 어린 시절로 끌고 간다.
어릴 적, 시골 겨울밤, 밤이면 들리던 부엉새 울음소리.
눈 내리는 산골 마을의 적막함.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많은 상상을 했던 나.
지금은 스페인의 겨울밤.
그 부엉새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만 같다.
백중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돈을 들고 십여 리 떨어진 자장면집으로 달려갔던 나,
그때의 자장면 한 그릇을 위한 설렘을
지금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이곳 순례길 위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다시 가슴 뛰게 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다음화
16화. 아침, 조용한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