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메세타의 밤, 별이 쏟아지던 그 길에

온타나스(Ontanas)

by 인생클래스

사라진 산볼의 별빛

오늘 걷는 코스 중간에는
산볼(San Bol)이라는 작은 숙소가 있다.


거대한 메세타 고원 한가운데,
불빛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외로이 자리 잡은 곳이다.

하룻밤 묵으면
도시의 편리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 아래에서 잠들 수 있다 한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겨울이라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아쉽던지...


뒤돌아보며
점점 멀어지는 빨간 지붕을 몇 번이나 다시 바라봤다.


별을 품은 숙소, 산볼.
그곳의 고요함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기억 속의 시골 밤하늘

아쉬움 담고 걷다 보니 문득 어릴 적 여름밤이 기억들이 떠올랐다.


여름날, 시골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누워서
쏟아지듯 반짝이던 별자리를 찾곤 했다.


겨울이면 저녁노을 질 무렵,
뒷동산에 올라보면
초가집 굴뚝마다 하얀 연기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피어오르곤 했다.


그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이젠 그 풍경이 사라졌다.

시골에도 가로등이 늘어서
밤의 어둠과 고요함마저 잃어버렸다.


그리움은 언제나,
사라진 풍경에서 온다.


길 위에서 떠올린 고향의 설렘

가끔, 갑자기 시골에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들판을 볼 때면
어린 시절 설렘이 되살아난다.


도착해 보면 모든 게 변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마음만은 늘 같다.


이 길을 걷는 것도 어쩌면,
잃어버린 고요를 다시 찾기 위한 여정인지 모른다.


순례자의 성당들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작은 마을마다 하나씩 성당이 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건물들.

몇몇 순례자들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


신앙과 감동이 뒤섞인 순간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서도,
그저 '웅장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감동하지 못한 나 자신이 미안했다.
종교를 향한 문이 아직은
내게 닫혀 있는 듯했다.


어쩌면 믿음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르니요스의 햇살

서리가 내려 굳은 진흙길을 밟으며 걷는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내 발자국이 오늘의 음악이다.


잠시 후, 오르니요스(Hornillos) 마을에 닿았다.


성당 앞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 두 분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평온한 오후를 즐기고 계셨다.


나는 그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알 수 없는 말을 하시며
이곳에 머물다 가라고 손짓하신다.


시간을 보니 아직 오후 한 시,
머물기엔 이른 듯했지만
곧 그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진흙길 위의 깨달음

오후가 되자 날씨가 풀렸다.
그 덕에 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발이 빠지고 미끄러져도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런길이 오래도록 구불구불 이어졌다.
한 굽이를 돌면 또 다른 굽이,
그 끝에는 또 새로운 길이 있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돌아가도, 미끄러져도,
결국 나의 길은 나를 데려간다.


온타나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지평선 끝에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끝없는 들판을 희망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움푹한 계곡 속에서
온타나스(Ontanas) 마을이 나타났다.

그곳 알베르게는 낡고,
주인은 불친절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길 30킬로를 홀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숙소가 어떻든,
사람의 표정이 어떻든,
이 길 위에서는 모든 게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내일의 길이
또 다른 별빛으로 나를 맞이하리라.


순례길의 의미

이 길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유로 걷는다.

누군가는 신앙을 위해,
누군가는 치유를 위해,
누군가는 단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에게 이 길은
삶의 소음이 걷히고 나서야 들리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여정이다.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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