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카리온(Carrion)의 아침, 세탁기 앞에서

사리온(Sahagún)~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by 인생클래스

새벽의 길, 아이리시 커피 한 잔


습관처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낭을 정리하고 길을 나선다. 새벽어둠이 아직 짙다.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차가운 공기,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배낭 소리만이 나를 깨운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어김없이 하나뿐인 카페가 문을 열고 있다.


그곳은 언제나 순례자들로 가득하다.

커피 한 잔과 간단한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며
서로의 걸음과 어제를 나눈다.


어떤 이들은 블랙커피에 위스키 몇 방울, 갈색 각설탕, 그리고 생크림을 얹어 아이리시 커피를 마신다.


추운 새벽,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며칠간 나도 그 커피로 하루를 열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이 잠시 녹았다.


엉뚱한 마을, 엇나간 지도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프스를 오르다 조난당한 청년이,
3일간 지도를 의지해 결국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들고 있던 지도는 알프스가 아닌 남미의 산악 지도였다.


방향이 틀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다.


오늘 나는 그 청년처럼, 엉뚱한 마을까지 걸어버렸다.


지도도, 숙소 이름도, 심지어 마을 이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스페인어는 서툴고,
그저 노란 화살표만 믿고 걷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다. 조금 허탈하다.

비교의 길 위에서


길가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이미 많이 걸었다고 착각했기에
남은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진다.

도로 옆 순례길을 걸으며
달려가는 차들의 속도와 내 느린 걸음을 자꾸 비교하게 된다.


누군가는 “가장 행복한 순간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순간”이라 했지만,
나는 이 길에서도 나를 자동차와 비교하고 있다.

1킬로마다 세워진 거리 표지판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지루함을 달래려 뒤에서 소리 내 달려 스쳐가는 자동차 색깔을 맞추는 게임을 해본다. 오늘은 흰색 승용차가 유난히 많다.


메세타의 한가운데


이곳 사리온(Sahagún) 지역은
한때 중세 순례길의 영적 중심지였다.

수도원이 세워지고, 수도사들이 순례자들을 맞이하던 곳이다.


수백 년 전, 이곳은 '피로한 영혼이 쉬어가는 성스러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조용한 평야와 오래된 돌담만이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 평원 위를 걷다 보면,
풍경은 단조롭고 하늘은 높다.
그러나 바로 이 단조로움이 마음을 비우게 한다.


길 위에서 불안이 가라앉고,
생각이 천천히 정리된다.

이곳은 어쩌면,
'비워야만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땅이다.

세탁기 앞에서


오후 다섯 시 반쯤, 숙소에 도착했다.

아침에 급히 출발하느라 속옷을 섞어 담은 탓에
빨래한 것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결국 전부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세탁기가 우렁차게 돌아간다.


그 앞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다.

마치 내 마음도 함께 세탁되는 기분이다.


회전하는 속옷들이 불평하는 듯하다.
"또 나야?"


꼼꼼하지 못한 내 성격, 참 안 바뀐다.

아내는 이 길을 위해
양말부터 속옷까지 같은 색으로 맞추고,
두 개의 가방에 나눠 정리해 줬다.


그 정성은 고마운데,
가방 색이 같아 더 헷갈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차라리 요일마다 무지개색 양말을 준비해 줬다면, 오늘 같은 날엔 참 좋았을 텐데...


고요한 수도원, 따뜻한 바람


오늘 머문 곳은 산타마리아 수녀원.
겨울이라 미사는 없었지만,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내 마음도 함께 건조되길 바란다. 마치 세탁 후 따뜻한 건조기 바람처럼.

두 노인과의 만남


오늘 걸으며 길 위에서 두 명의 노인을 만났다.

한 분은 산티아고 주민으로,
순례길 도착지에서 출발지 방향으로 역으로 걸으며 순례자들에게 외친다.

"부엔 까미노!"


평생을 이 길 위에서 보내며
걷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또 한 분은 콜롬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식사를 못 했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조금 의심도 들었지만,
그 나이에 하루 40킬로를 걷는다는 말에
작은 정성을 전했다.


나는 생각했다.
훗날 내가 그분들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노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원하나.


여행인가, 도피인가


이 길은 나에게 여행일까?
아니면 지난 4개월간의 상처를 잊기 위한 도피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후자에 더 가깝다.

하지만 언젠가 이 길의 끝에 닿았을 때,
그땐 현실 도피가 아닌, 삶의 의미를 다시 붙잡은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오늘 밤,
고요한 수도원에서 조용히 기도해 본다.


카리온, 비움의 땅


카리온은 화려하지 않다.
단조롭고, 고요하고, 가끔은 지루하다.


하지만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마음이 정화된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또 하루를 걸었다.


카리온(Carrion) — "부엔 까미노"가 가장 진하게 들린 곳

삶은 방향이 아니라, 포기의 순간을 견디는 힘이라는 걸 이 평야 한가운데서 배운다.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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