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끝이 없는 길 위에서, 나를 마주하다

카리온(Carrion)->모라티노스(Moratinos)

by 인생클래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아침, 카리온(Carrion)의 도심을 빠져나오자
끝없이 뻗은 아스팔트 길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5킬로미터 남짓한 직선 길 끝에 닿을 즈음,
이내 인적 없는 비포장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저기쯤 가면 뭐라도 있겠지.'
하지만 그곳에 도착할 때마다 똑같은 지평선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이 길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끝없는 평원이 오늘은 왠지 두렵게 다가온다.


너무 지루해지자, 나는 고개를 숙인다. 앞을 보기엔 끝이 없고, 발밑을 보며 걷는 편이 조금은 덜 지친다.


작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하얗게 내린 서리에 얼어붙은 풀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귀 기울인다.

문득 떠오른 한 친구.
어릴 적,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아이였다.


그 친구는 늘 땅만 보고 걸었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눈길을 정면으로 보은 경우가 많지 않았다.

우린 그를 '돈 줍는 애'라고 놀렸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늘 속에 있던 아이의 마음을
그땐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 친구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가끔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오늘,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위에서
그 아이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또다시 상처를 주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때처럼, 나중에 후회할 일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길 위에 조용히 한숨이 내려앉는다.


오랜 시간 아무 풍경 없이 똑같은 길을 걸어오던 그 끝, 어느 순간 이름조차 낯선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이 드디어 멈춘다.


길 위의 마을들은 신기하다.
지평선 위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끝없는 들판을 걷고 또 걷다가
어느 모퉁이를 도는 순간,
불쑥 눈앞에 나타난다.


마치 이 길을 걷는 이 들에게 주는
작은 깜짝 선물처럼.


이후로 이어진 10킬로미터 남짓의 길은
'전통의 카미노'라 불리는 구불구불한 오솔길.
한결 정겹고, 낯익은 순례의 리듬이 되살아난다.


Terradillos에서 숙소를 찾았지만,
도착하니 공사 중이었다.


함께 걷던 대학생 이 앱을 켜
3km 떨어진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냈다.


이름은 Hospital San Bruno.
시골 닭장을 개조한 듯한 숙소였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출발할 누군가가 이곳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저녁식사도 외부 이용이 불가능하고,
숙소 등록 시 식사비까지 강제로 결제된다.


이곳에 이미 머물렀던 한국 순례객이 방명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식사하지 마세요.
마을 입구의 레스토랑을 추천합니다."


숙소 주인은 겉보기엔 점잖고 교양 있어 보였지만 난방을 부탁하자 얼굴이 돌변했다.


숙소 조명까지 순례객이 관리하는 게 아니라 직접 통제한다.


"그래도 너희는 결국 오게 돼 있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등록을 마쳤고,
이 겨울밤을 피할 곳은 이곳뿐인데.


한밤중, 목이 말라 밖으로 나왔다.
서쪽 하늘엔 반달이 기울고,
마을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속에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났다.


별들의 무리.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하늘.
그 별빛이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덮어준다.


이곳에서 나는,
그저 저 별빛만 기억하리라.

걷는 이들을 위한 메모


겨울철 순례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
출발 전, 반드시 ‘Camino Pilgrim’ 앱을 다운로드할 것.

공용(M), 사설(P) 알베르게, 슈퍼(Dia),
현재 위치를 오프라인에서도 알려준다.


안내서에만 의지하다가
닫힌 숙소를 만나 하루 계획한 것보다 10킬로 이상 더 걷게 된다면,
그건 너무 고된 일이다.

게다가 무례한 주인을 만나는 복병까지 더해진다면
오늘의 성취감마저 상처받게 될 것이다.

정보는 곧 나를 지키는 방패.
이 말, 잊지 말자.


모라티노스(Moratinos) — 와인의 기억이 잠든 마을


모라티노스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낮은 언덕엔
옛 와인 저장고였던 동굴들이 남아 있다.


지금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지나가는 이들에게 조용히 문을 열어둔다.


그곳에서 나는,
오래된 와인의 숨결처럼
오늘 하루의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힌다.

다음화

20화. 안갯속을 걷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