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결국 조금씩 더 걸어보는 일
가슴에는 반짝이던 새벽 별빛의 기억만 가득 담겼다.
길 위엔 안개가 자욱하다.
어제처럼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보다 이렇게 안갯속을 걷는 게 오히려
덜 지루하다.
저 안개 너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조금만 더 가면 오늘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 기대감 하나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이 길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막연히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야'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텨온 시간들처럼,
카미노의 길도 오늘 한 걸음 내딛으면
또 다른 내일이 열린다.
걷다 보면 문득,
'벌써 이만큼 왔구나' 하는 작은 성취감이 찾아온다. 행복이란 그런 것 아닐까.
아침에 눈을 떠 걷고 싶은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으며,
걷다 보면 자연의 숨결을 마주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응원해 주는 가족이 있다면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문득 가족이 그리워졌다.
예전에 택시를 타면 빠짐없이 운전석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기도하는 소녀상이 걸려 있었다.
나에겐 종교가 없지만
그 소녀상의 간절한 눈빛을 볼 때마다
기사님들을 꼭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내 가족도
가장의 하루가 무사하길 바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겠지.
그런 시간들이 오늘의 평안을 만들어준 걸지도 모른다.
안개 낀 들녘을 걷다 보면
축사 사이로 풍겨오는 농장의 냄새가
왠지 정겹게 느껴진다.
그 냄새 속엔 오래전 고향의 기억이 스며 있다.
오늘은 부산에서 왔다는 젊은 두 학생과 함께 걷는다.
그들은 ‘한식을 직접 조리할 수 있는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20일 넘게 집을 떠난 순례길에서
한국 음식의 향수를 달랠 수 있다니—
그 말만으로도 하루가 기대되었다.
마트에 들러 고기와 채소, 고추장을 챙겼다.
숙소에 도착하니 오래된 시골집 같은 분위기.
마당엔 닭들이 어슬렁거리고,
주방엔 주인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삼겹살을 굽고, 김치를 곁들이며
20일 만에 진짜 '집밥'을 먹었다.
따뜻한 밥과 웃음이 함께하니
몸도 마음도 금세 풀렸다.
식사 중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언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세요?" 그러자 그 학생들은 함께 걷기 위해 내 일정에 맞춰 자신들의 계획을 바꾸겠다고 했다.
그 마음이 고맙고, 동시에 미안했다.
그들도 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걸음을 맞춘 사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웃고 대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오늘은 일부러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잠자리에 들며 결심했다.
내일은 그들보다 먼저 떠나야겠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지만,
그들만의 여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난 이 길을 혼자 걸으며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 이곳에 온 거다.
내가 먼저 떠나는 이유를
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한국 순례자라면
한식 조리가 가능한 알베르게 정보를
'Camino Pilgrim' 앱에서 미리 확인하길 권한다.
이 앱은 공용(M), 사설(P) 숙소뿐 아니라
위치, 편의시설, 운영 여부까지
오프라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길 위의 피로를 덜고,
따뜻한 한 끼의 위안을 얻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면 좋다.
다음화
21화. 레온(Le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