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외롭게 걷고 싶다.
20여 일 만에 맛본 한식,
그리고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걷던 한국의 젊은 친구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홀로 먼저 떠나야지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길을 시작할 때는 혼자 걷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했는데,
이제는 외로움이 밀려들고
그들과 함께 걷고 싶다는 마음도 어렴풋이 피어오른다.
결국 새벽 1시,
잠 못 이루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불을 켜고,
창밖이 밝아지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다행히 주방과 공동숙소가 분리되어 있어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학생들도 일어나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위해 들어왔다.
잠시 마음의 갈등.
"말을 할까, 말까…"
그런 내면의 흔들림을 따라
그저 조용히 배낭을 메고 나서며,
"조금 일찍 출발할게요" 어제 함께 걸었던 젊은 친구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넨다.
밖은 아직 어둠이 짙다.
손전등 없이는 걷기조차 어려운 길.
조심스레 화살표를 따라 한 시간쯤 걸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머물렀던 마을 하늘 위로
여명을 알리는 환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오늘의 길도 잘 정돈된 옛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서너 시간을 걷고서야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친다.
그 후로는 다시, 끝없이 펼쳐진 겨울 평야를
홀로 걷는다.
오후 들어 눈보라가 몰아친다.
바람은 걷는 길을 정면으로 막고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맥만이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잊기 위해 이 길을 걷는 걸 택했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 걷고 있다 보면
자꾸만 지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혼자의 자유 속에
지난 4개월간 겪었던 인간관계의 상처와
배신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어느 순간,
길 위에 서서 크게 욕설을 내뱉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목소리엔 분노가 섞여 있었고
그것은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좋았던 시절의 추억과
쓰라렸던 지난 시간들이
오버랩되어 떠오르고
나는 그 분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의 문을 닫아두고 싶었다.
과거로 향하는 그 문을…
차라리 잠가버리고 싶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레온.
비까지 내리는 밤.
마침내 도시에 닿았다.
레온은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고,
그 후 오랜 세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부딪쳤던 역사의 도시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고대와 현대가 어색하게 뒤섞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도시 곳곳의 건축물은
그 자체가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이시도르 왕립 대성당, 장엄한 고딕 양식의 레온 대성당,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산 마르코스 성당 등
한 도시 안에 이렇게 많은 건축의 시대들이 공존하다니 레온은 그 자체로 한 권의 두꺼운 역사책 같았다.
숙소는 고민 끝에
도심 속 알베르게로 정했다.
수도원 소속의 공용 숙소보다는
오늘은 조금 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머물고 싶었다.
다행히 숙소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이 오면 함께 방을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 늦은 시간, 누가 오랴.
레온은 스페인 북서부 레온 지방의 수도이자
스페인 4대 도시 중 하나다.
'레온'은 사자라는 뜻.
이곳엔 가우디의 초기 작품도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도시다.
그런 도시를,
밤에 도착해 아침 일찍 떠난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도심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온 나 자신에게
작은 위로의 만찬을 선물하고 싶었다.
숙소 직원이 추천한
도심 중심부의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레온에서 손꼽히는 식당이라는데
내 누추한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동양인이란 이유 때문인지
종업원의 태도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괜한 호기를 부렸다.
파스타에 와인 한 병.
오늘 걸은 거리만큼이나
과한 저녁 식사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스스로를 위로해도 되는 밤이니까.
오늘의 마음 한 조각
혼자 걷는 시간은 자유지만,
때로는 외롭다.
그 외로움이 문득 지난 시간의 상처를 꺼내기도 하고 돌아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걷게 한다.
내일을 향해서.
다음화
제22화. 산마르틴(San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