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산마르틴(San Martín)

비와 함께 걷는 날,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다

by 인생클래스


아침부터 빗줄기가 내린다.
비 오는 날의 길은 늘 걱정이 앞선다.
돌길이 미끄럽고, 젖은 신발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가 발끝을 무겁게 만든다.
그래도 이 길 위의 순례자들은 묵묵히 걷는다.
하루를 견디면, 또 다른 하루가 열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느덧 레온(León)을 지나왔다.
이 도시는 중세 때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고,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예술과 역사의 향기가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비춘다고 했다.
나는 그 빛을 등에 지고 다시 서쪽으로 향한다.


비가 내리는 길 위에서
먼저 이 길을 걸었던 분들이 내게 조용히 격려의 말을 전해왔다.


"이제부터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걸으세요. 지나고 나면 다 아쉬움뿐이랍니다."
"마음에 남은 응어리도 이 길 위에 내려놓고 가세요."

그 말들이 비보다 더 깊이 스며든다.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단지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눈치 보며 살아온 시간들,
무언가에 쫓기듯 달려온 나날들에서 벗어나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은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찾아가는 걸까?'


겨울의 순례길은 여름처럼 붐비지 않는다.
그래서 더 고요하고, 더 깊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마음이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이렇게 혼자 걷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절반쯤은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온 건 아닐까?'

그런 질문이 조용히 스며든다.

억울함과 분노, 후회 같은 감정들은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비 내리는 길 위에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괜찮다, 오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렇게 내 안의 독백을 흘려보낸다.

비와 함께, 바람과 함께.

거센 바람을 뚫고 도착한 오늘의 숙소,
빌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áramo).

오늘은 나 혼자뿐이다.
주인도 나, 손님도 나.

2층 작은 방의 테라스에 나가니
옆집 마당에 닭 몇 마리가 한가롭게 돌아다닌다.
오래전 고향의 풍경처럼 평화롭다.


문득 상상해본다. 도심에서의 삶,직장도 끝났으니
도시의 빠른 속도와 복잡한 관계에서 잠시 내려
이런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면 어떨까.
닭 몇 마리를 키우며, 하루 세 끼를 감사히 맞이하는 삶.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내 마음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을까.

어릴 적,
우리 집 닭이 낳은 계란에 노른자가 두 개 들어 있었다며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작은 일에도 웃음을 짓던 시간.
그 감사의 태도를 나도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제부터는 어느 순례자가 남긴 말처럼
안단테(Andante) — 천천히, 느리게 살아야겠다.

아니,
조금 더 느리고 깊이 머무는
아다지오(Adagio)의 속도로 가면 어떨까?.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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